
전주시 강암서예관은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년) 선생의 시문집을 테마로 국제서예가협회 회원들이 참여한 ‘강암 시문전’을 개최, 서예의 정신적·예술적 가치를 재조명한다.
국내 최대의 서예 단체인 국제서예가협회 회원 특별전으로, 26일부터 다음달 26일까지
하석 반원규, 유재 김종현, 심석 김병기, 호암 윤점용, 중하 김두경 등 국내 서예작가 100여 명의 작품 167점을 만나볼 수 있다.
강암은 일제가 막 조선을 병탄해 국가와 민족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있던 1913년 7월 9일 김제군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그는 '신체적으로 굳건하여라(剛菴)'는 뜻에서 아버지 유재 송기면(裕齋 宋基冕,1882-1956) 선생으로부터 호를 강암으로 부여받았다고 한다.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 이란 이름은 전주가 전라남,북도, 제주도를 통합하는 전라감영의 문, 호남평야의 첫 관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는 북쪽이 허해 부가 드물다고 해서 지세상 허술한 그 쪽을 누르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지난 1977년 5월 기존 4차선 진입로에 건립됐다. 이어 1991년 전국체전 진입로 확장으로 헐렸으며, 1994년 8월 13일 현재의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전주 IC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여의도광장에 길이 43미터, 폭 3.5미터. 높이 12.4미터를 갖고 있다.
'호남제일문' 편액은 단아하면서도 한편 웅장한 듯하면서도 자칫 권위롭기 쉬우나 오히려 따뜻한 필치가 우아함을 드러낸다. 이는 강암선생의 글씨다.
그는 5세부터 15세까지, 부친으로부터 전통 유학, 성리학, 그리고 서예를 배웠고, 시문(詩文)과 서예 5체에 골고루 능했다. 청년기 이후 서예에 더욱 매진, 중국으로부터는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저수량, 동기창, 미불, 황정견, 하소기, 등석여, 오양지, 오창석, 정섭, 우우임의 서법을 두루 학습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신위, 김정희, 김용진, 김진우, 손재형 등의 서예를 두루 수용하여 각 서체의 묘리를 융합함으로써 그만의 고유한 강암체를 이루었다.
강암은 선친의 가르침에 따라 민족의식이 강했다.
일제의 단발령에 항거하여 명성과 보명을 지키고 한복을 고수했으며, 현대 개혁을 거부했다.
일본어를 멀리하고 우리의 문자인 한글을 익혔으며, 자립하여야 할 우리의 전통문화와 유학의 도를 철저히 지키며 일본문화는 의도적으로 배척했다.
선생은 일찍이 구양순, 미원장, 동기창, 황산곡, 유석암, 하소기, 추사 등 중국과 한국서예대가의 5서체(書體)를 두루 섭렵하고, 선친 유재 송기면과, 영운 김용진, 일주 김진우로부터 문인화를 익혔다. 고법창신(法古創新)의 서예로 고법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 조형미를 갖춘 독창적인 강암체(剛菴體)를 확립했다. 서예5체(篆 . 隸 . 楷 . 行 . 草)는 문론 문인화(梅 . 蘭 .菊 . 竹과 松 . 蓮 . 牧丹. 芭蕉)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두루 능숙해 한국서예계의 중흥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문인화의 풍죽(風竹)은 강암선생의 강직한 성품을 예술로 승화시킨 독보적인 작품으로 평가되어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선생의 작품은 호남을 비롯, 경향각지에 비문. 현판 등 수천;여점이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도 호남제일문. 내장산내장사. 토함산석굴암. 두륜산 대둔사. 불국사 자하문. 불국사 불국선원.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 비명. 연지문. 금산사 보제루. 백양사 화엄전. 화엄사 적멸당.금오산 향일암.동춘송 선생 유허비.신도비 등의 대필은 강암선생의 웅혼한 기상을 그대로 말해준다.
국전 초대작가로, 대한민국미술대전,전라북도 미술대전, 동아미술대전 등을 비롯한 국내 여러 서예대전 심사위원과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선정위원으로 참여, 한국서예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일찍이 1967년도에 서화연구단체인 '강암연묵회'를 만들어 후학 지도와 인재양성에 힘썼다.
연묵회는 강암 선생 작고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으로 2008년까지 연 40회의 회원 작품전을 개최했으며, 매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한. 중. 일서예가교류전, 한.일문화교류전, 중화민국역사박물관초대전, 6회에 걸친 한중이문연의전의 개최로 서예술의 국제교류에도 공헌을 했다.
1995년도에 동아일보사가 주최, 마련한 '강암송성용회고전'의 대주제는 '강암(剛菴)은 역사(歷史)다'이다.
이는 언론이 이 함축된 표현을 빌러 후학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노대가의 생애와 예술을 되돌아보게 하는 자리였다.
1998년도 광주시문화상(의재미술상) 수상 기념으로 1999년 10월에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강암송성용선생유묵전'을 개최, 돌아가신 선생님의 유덕과 예술혼을 기리는 자리를 마련했다.
선생은 유도회 전라북도위원장, 간재사상연구회장을 역임, 유학발전에도 크게 힘썼다.
문교부장관상, 전라북도문화상, 전주시민의장, 월남이상재선생찬하장, 대한민국문화훈장, 광주의재미술상 등을 수상했다.
선생은 무엇보다 사재로 1995년도에 강암고택 옆에 '전주시 강암서예관'을 세워 강암선생 작품과 국내외 유명작가의 작품 등 1,162점을 전주시에 기부, 국내초유의 서예전문전시관을 개관했다.
강암서예관 옆에 선생이 살았던 ‘아석재(我石齋, 전주 천동로72)'가 있다.
선생은 1965년 이곳 ‘아석재’에 터를 잡고 35년 동안 거처하면서 서예술의 꽃을 피웠다.
'아석재'는 ‘물과 돌이 있는 데서 유연하게 살리라’라는 뜻을 담고 있는 주자의 시구절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유래한다.
거문고 켜고 책 읽은지 사 십년에
거의 산중 사람 되었네
하루는 띠풀집 지어져
나의 산수에 고요히 서 있네
琴書四十年
幾作山中客
一日茅棟成
居然我泉石
[朱子全書,卷66, 武夷精舍 雜詠(무이정사 잡영)]
'아석재'는 선생을 위해 친구들이 마련해준 집이다. 이 글씨는 소전 손재형이 썼으며, 남취헌은 일중 김충현이 썼다.
별반 특별해 보이지 않는 소박한 한옥일 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콘텐츠가 무궁무진하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을 비롯한 당대의 대가가 휘호한 것이고, 집 안 곳곳에는 평생 상투와 한복을 입고 고집스럽게 전통을 고수하고 산 선생의 지조가 어려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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