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 최씨의 육상궁(毓祥宮) 통해 궁원제의 성립 과정 살펴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칠궁’ 기획전 통해 역사 속 정읍출신 숙빈 최씨 등 숨겨진 이야기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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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어머니, 그러나 왕비가 아니었던 여인들. 화려한 궁궐의 역사 뒤편에 가려져 있던 숙빈 최씨(1670~1718)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정읍 태인 출신 숙빈 최씨는 관직을 맡아 부임하는 민씨 부부의 눈에 띄어 훗날 궁궐에 들어가 무수리로 지내다가,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 되고, 21대 영조의 어머니가 된 인물이다.

정읍 태인면 태창리 대각교(大脚橋)는 숙종의 후궁이자 조선 제 21대 왕 영조(1694~1776)의 생모인 숙빈 최씨 설화가 깃든 곳으로, 조선왕조 500년에서 최고의 신분상승을 이룬 사례로 꼽히는 영조의 생모의 이야기가 서려있다.

조선왕조 임금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 자리를 지킨 영조는 왕위에 오른 내내 숙빈 최씨의 지위를 격상시키며 자신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태평성대를 누린 시기지만, 어머니 숙빈 최씨가 궁중 나인출신이어서 열등의식에 시달렸다 한다. 숙빈 최씨는 7세 때 입궁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입궁 전 기록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숙종의 후궁이 된 후 기록은 왕자를 출산한 호산청 일기 등 자세한 사료들이 남아 있다.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후 인현왕후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다 알려져 있다.

훗날 영조가 된 둘째 아들 연잉군을 낳고 ‘귀인’이 됐으며, 단종이 복위됐을 때 ‘숙빈’으로 승급됐다. 숙종의 총애를 받은 숙빈 최씨는 희빈 장씨가 세상을 뜨자 왕비가 될 수 있었지만, 희빈 장씨의 폐해에 지친 숙종이 ‘후궁이 왕비가 되서는 안된다’고 내린 법령에 따라 왕비도 못되었고,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어머니의 지난날을 안타까워하며 어머니가 궁중 나인으로 일을 할 때 누비를 짓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는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의 손주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에 서린 한을 풀어냈다면, 영조는 고생하고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기리며 사모곡을 불렀을 것이다.

1936년에 펴낸 장봉선의 '정읍군지'는 숙빈 최씨가 정읍현 태인면에서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랐고, 이후 인현왕후가 간택돼 입궁할 때 대동했다고 적었다.

대각교에서 귀인인 인현왕후의 가족을 만나 훗날 궁에 들어가 소원을 이룬 전설이 기록되어 있고, 정읍에는 그 만남을 기념하는 ‘만남의 광장’도 있다. 전남 담양군 용흥사 전설에서도 그가 인현왕후의 시녀로 입궁했다고 했다. 때론 서울 여경방 서학동이 출신지로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숙빈 최씨의 어린 시절에 관한 정확한 사료가 없어 알 수 없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22일부터 2026년 6월 26일까지 ‘칠궁, 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 기획전을 갖는다.

이번 전시는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지만, 조선의 왕을 낳아 ‘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의 삶과 그들을 기리는 사당 ‘칠궁’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경복궁 북쪽에 자리한 칠궁(七宮)은 청와대 영빈관 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칠궁은 대빈궁, 육상궁, 경우궁, 저경궁, 연호궁, 선희궁, 덕안궁을 통칭하는 명칭으로, 각각 흩어져 있던 사당을 1908년 육상궁 경내로 통합하고 1929년 덕안궁까지 옮기면서 오늘날과 같은 ‘칠궁’이 됐다.

이번 전시는 장서각 소장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칠궁의 역사적 흐름을 다섯 개의 주제로 나눠 구성됐다.

전시는 ‘왕실 제사 위상의 변화’라는 독특한 시각으로 칠궁의 역사를 다섯 가지 주제로 깊이 있게 파고든다.

△제1부 '육상궁, 영조의 사모곡에서는 숙빈 최씨의 육상궁을 통해 궁원제의 성립 과정을 살펴본다. 대표 전시 유물로 1753년(영조 29) 영조가 숙빈을 위한 궁원제를 선포하면서 그 제도와 의례를 기록한 '궁원식례'가 있다.

육상궁(毓祥宮)과 소령원(昭寧園)은 조선 영조가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기리기 위해 마련한 사당과 묘이다.

‘궁원식례(宮園式例)’는 1753년(영조 29) 영조가 숙빈을 위한 궁원제를 선포하면서, 그 제도와 의례를 기록한 규정집이다. 장서각에는 육상궁&;소령원에 관한 3종의 ‘궁원식례’가 소장되어 있다. 1756년(영조 32) 6월 28일에 영조는 ‘궁원식례’를 ‘원편(原編)’, ‘보편(補編)’, ‘정본(定本)’으로 구분하고 원편과 보편을 교정하여 정본으로 간행하게 했다. 이러한 3종의 ‘궁원식례’를 통해 궁원제의 정비와 변화에 반영된 영조의 지향을 확인할 수 있다.

원편은 1753년 6월 25일 궁원제 선포 이후, 약 20일 만에 완성되었다. 그런데 원편의 편찬 직후부터 영조는 효를 다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새로운 의례를 보완하여, 원편과는 별도의 책으로 ‘궁원식례보편’을 편찬하게 했다. 원편에서 육상궁의 제사에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犧牲)인 생고기 대신 일상의 음식인 유밀과를 올리고, ‘작(爵)’ 대신 ‘은잔’을 사용하였으며, 폐백을 생략했다. 반면 보편에는 종묘와 동일하게, 술항아리를 배치하고, ‘작’을 사용하고, 폐백을 추가하여 일반적인 속제와 차등을 두었다. 또한 원편에서 숙빈 최씨를 ‘사친(私親)’으로 칭했다면, 보편에서는 ‘선자친(先慈親)’으로 변경했다.

정본은 1756년에 원편과 보편을 통합, 교정한 후 실록자로 간행됐다. 이 과정에서 숙빈의 호칭은‘선비(先&;)’로 일괄 수정됐다. 사망한 어머니를 지칭하는 ‘비(&;)’는 사망한 아버지인 ‘고(考)’와 짝을 이루어 적통을 의미하였으므로 후궁인 생모에게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조는 1755년 12월에 주례(周禮)를 근거로 숙빈의 호칭을 ‘선비’로 변경했고, 이러한 결정을 정본 ‘궁원식례’를 통해 제도적으로 확립하고자 했다.

'육상궁 상시책인의(毓祥宮 上諡冊印儀)'는 1753년 영조의 하교에 따라 육상궁에 시책(諡冊)과 시인(諡印)을 올리는 의식과 과정을 정리, 편찬한 책이다. 영조는 1753년 6월 25일 숙빈의 시호를 ‘화경(和敬)’으로 정한 후 다음날 육상궁에 친림하여 고유제를 지내고 신주를 고쳐 썼다. 숙빈에게 시호를 올리는 것은 왕후로 추숭하지 않으면서 효를 다하기 위한 의기(義起)의 방식으로 강조됐다. 그런데 한 달 뒤인 7월 27일에 영조는 시책과 시인을 갖추어 시호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영조의 뜻에 따라 8월 6일 육상궁에서 시책&;시인을 올리는 최초의 상시책인의(上諡冊印儀)가 거행됐다.

국가례에서 ‘보(寶)’와 ‘인(印)’은 그 용어 자체로 왕&;왕비와 세자&;세자빈의 신분을 특정했다. 후궁은 ‘인’을 받는 대상이 아니었지만, 영조는 숙빈을 위해 세자빈의 옥인보다 격이 낮은 은인(銀印)을 시인으로 정했다. 영조는 후궁의 의례적 차등을 인정하면서도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는 ‘상(上)’자를 사용해야 한다는 효의 논리를 강조했다. 따라서 어머니를 위한 ‘상’자와 신분적 제약에 따른 ‘인’자가 충돌하는 ‘상시책인의’의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예법과 인정에 모두 합당한 사친 의례를 정비하려는 영조의 의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2부 ‘저경궁과 대빈궁, 궁원제의 명암’에서는 인빈 김씨와 희빈 장씨의 대비되는 삶을 조명한다.

이어 △3부 ‘연호궁과 선희궁, 정조의 의도된 선택’은 정조가 어머니와 다름없는 두 후궁에게 보인 미묘한 차이를 다루며, △4부 ‘경우궁, 순조의 애도’에서는 유빈 박씨를 향한 순조의 애틋한 마음을 보여준다.

△5부 ‘덕안궁, 궁원제의 쇠락’에서는 대한제국 시기 덕안궁을 통해 변화하는 왕실 제도의 흐름을 되짚어본다.

이번 전시에서는 '궁원식례', '추존시의궤', '칠궁 약도' 등 칠궁의 역사를 증명하는 주요 자료 60여 점이 대거 공개된다.

이 자료들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후궁들의 삶과 왕실 제사의 비밀스러운 면모를 생생하게 증언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이번 전시에 사용된 자료들은 1981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옮겨져 현재 장서각이 보존·관리하고 있는 유물들이다. 이 자료들은 칠궁의 원래 모습과 역사적 의미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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