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화중 판결선고서
손화중은 1861년 전북 정읍시 과교동에서 부친 손호열(孫浩烈)과 모친 평강 채씨(蔡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全州史庫)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겨 보존했던 손홍록(孫弘祿)의 후예이다. 이름은 정식(正植)이고 자(字)는 화중(化中, 또는 華仲). 호는 정읍의 옛 이름을 따 초산(楚山)이라 하였다. 어린 시절 이웃 마을 음성리로 이사하여 서당에서 한문 등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주위로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고 한다. 12세 때 고흥유씨(高興 柳氏)와 결혼했다.
20대에 지리산 청학동에 들어갔다가 당시 지리산 일대에 널리 전파되고 있던 동학(東學)을 만나 입도하였다. 2년 뒤 고향으로 돌아온 손화중은 부안(扶安), 정읍 농소리(農所里), 입암면 신면리(新綿里), 음성리 본가를 거쳐 이윽고 무장현(茂長縣)을 근거지로 삼아 동학 포교 활동에 전념했다. 무장현에서는 처음에 읍내 김모(金某)의 집을 본부로 삼았으나 얼마 후 덕림리 양실 마을(德林里 兩谷, 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양실마을)로 옮겼다.
1993년 4월 2일 필자를 포함한 전북일보 동학농민혁명 특별취재팀이 양실 마을을 찾았을 때 50여 호로 추정되는 농가가 있는 마을 뒤쪽으로 수령 3백 년 이상으로 보이는 노송(老松) 세 그루가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주민 정태균(鄭太均, 당시 55세) 씨는 노송은 자신의 10대조가 심은 것이며, 매년 정월 대보름 때에는 동제(洞祭)인 천룡제(天龍祭)를 지내고 있다고 했다. 다른 주민 정용균(鄭鎔均, 당시 43세) 씨는 갑오년 당시 동학 도소(都所)는 현재 슬레이트집으로 된 마을 입구 농가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말을 조부에게 들었다고 증언했다. 동학 도소가 있던 집은 손화중 대접주가 동학으로 끌어들인 이 모(李 某)라는 부자의 집으로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마당이 넓었다고 한다. 정태균 씨는 자신이 어렸을 때는 동학을 믿는 가구가 20여 호나 되었다고 했다.
양실 마을을 근거지로 한 손화중의 포교 활동은 무장, 정읍, 고창, 부안은 물론이려니와 광주, 나주, 장성. 담양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손화중은 오늘날의 전라남북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이른바 사고(事故)가 난 동학의 접포(接包) 조직을 재건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다녔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떠돌이 접주’였다. ‘떠돌이 접주’ 즉 대(大) 조직가로서 손화중의 면모는 사료에서도 확인된다. 오지영(吳知泳)의『동학사』(영창서관, 1940)에 따르면, 1894년 3월 25일경 동학농민군 8천여 명이 부안 백산(白山)에 집결하였는데 그 절반에 가까운 4천여 명이 손화중 대접주 소속이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손화중의 나이는 34세였다. 그는 전봉준보다 6세 연하였으며,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등 다른 지도자에 비해서도 연소했다. 그런데도 손화중이 최대 규모의 농민군을 거느렸다는 것은 손화중이 탁월한 리더쉽을 지닌 지도자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손화중의 리더쉽에 대해 고(故) 김지하 시인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한 마디로 남접(南接)의 핵심은 손화중 포(包)에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손화중의 태인(泰仁)&;무장(茂長) 포(包)는 단순히 지역적인 하나의 포를 넘어서 인근의 전라남 북도 일대에 엄청난 영향을 가진 큰 붕새와 같은 조직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오지영의『동학사』에 나오는 것처럼, 미륵불의 배꼽 밑에서 천비문서(天秘文書), 비 결(秘訣)을 파내는 사건과 관련된 인근 민중들의 격동 중 손화중 밑의 소두목들이 보 여 준 행동과 그들의 거취 등에서도 명백히 보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몇 년 간격으로 여러 포의 접주(接主)를 전전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녁땅 뱃노래』, 두레, 1985, 183쪽)
1891년 3월 손화중은 공주 신평(薪坪; 현 공주시 사곡면 신영리 신평마을)에 은거하고 있던 해월을 찾아 처음으로 직접 지도를 받았다.(「김낙철역사」) 또한, 해월이 1891년 5월부터 7월까지 익산, 부안, 고부, 태인, 금구, 전주를 순회하며 포교 활동을 했을 때도 지도를 받았다. 해월의 직접 지도를 받은 뒤 손화중의 포교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민심도 손화중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1892년은 임진왜란 3백 주년이 되던 해로써 흉흉해진 민심은 미륵불 출세나 정(鄭) 도령과 같은 진인(眞人) 출현을 대망하고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1892년 8월 손화중 포 관내에서 ‘석불비결 탈취사건’이 일어났다. 오지영의『동학사』의 내용을 인용한다.
사건의 내용은 무장 선운사 용문암(龍門庵) 석불(石佛) 배꼽 속에 있는 비록(秘錄)이라 는 것을 동학당(東學黨)들이 훔쳐 갔다 하여 강도 행위요 역적 모의라 하여 일으킨 사 변이다. (중략) 동(同) 비록을 동학당 수백 명이 승야(乘夜) 돌입하여 동사(同寺) 승도 들을 결박하여 놓고 석불의 배꼽을 떼고 그 비록을 빼 갔다는 것으로 관헌들은 이것을 기화로 강도 겸 역모로 몰아 대토벌을 시작한 것이며, (중략) 동학당들은 할 수 없이 폭력으로써 해결할 것을 밀의(密議)하여 수천 명의 도당으로 무장읍(茂長邑)을 에워싸 고 일변(一邊) 관아를 습격한다 위협하였다. 그리된 결과 동학당의 수는 날로 늘어가는 영향이 현저히 드러났었다. (『동학사』초고본, 1926)

석불비결 탈취사건을 전하고 있는 두 권의 책
『동학사』에 따르면, “동학당 수백 명이 승야 돌입하여 동사 승도들을 결박하여 놓고 석불의 배꼽을 떼고 그 비록을 빼 갔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수백 명의 동학당은 바로 손화중 포의 동학 교도였다. 이것은 동학혁명 이전 단계부터 이미 널리 확대된 손화중 포의 규모를 웅변해 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석불비결 탈취사건’ 이후에도 날이 갈수록 조직이 확대되어 갔던 손화중 포는 일본 측에서조차 호남의 5대 포의 하나로 지적하고 있을 정도로(『주한일본공사관기록』한글본 1, 1986, 163쪽) 그 규모가 컸다. 그러므로, ‘석불비결 탈취사건’은 날로 그 명망이 높아가고 있던 손화중의 인물 됨됨이를 비롯하여 손화중 포의 조직 활동의 추이(推移)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무장포고문 원문, 1894년 3월 20일
1894년 1월 10일, 1천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약 두 달여에 걸쳐 고부농민봉기(古阜農民蜂起)를 주도했던 전봉준은 고부봉기를 진압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李容泰)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3월 13일경 손화중의 근거지인 무장으로 피신한다.(「전봉준 판결선고서」) 양실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손화중은 처음에 전봉준의 전면 봉기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봉준의 끈질긴 설득에 따라 자신이 땀 흘려 조직해 놓은 약 4천 명의 포(包) 조직을 고스란히 전봉준에게 넘겨주었다.(최현식,「동학혁명의 향토사적 연구-갑오 동학혁명에 있어서 손화중의 역할을 중심으로-」,『한국학논집』10,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1986, 387쪽) 1894년 3월 혁명 당시, 전봉준 장군은 손화중 도소가 있던 괴치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堂山; 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내 마을)에서 3월 16일경부터 전면 봉기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여 20일경 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을 선포한 뒤 그다음 날 3월 21일에 조선왕조 전체의 폐정개혁을 위한 전면 봉기를 단행한다. 바로 이때 녹두장군 전봉준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해 손을 잡은 손화중은 동학농민혁명 기간 내내, 그리고 혁명이 좌절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날까지 전봉준과 운명을 같이 한다. (「전봉준, 손화중, 최영창=경선 판결선고서」) 손화중은 녹두장군 전봉준과 죽음마저 함께 했던 영원한 동지였다. 끝으로, 손화중 대접주의 최후의 모습이 담긴 사료를 소개한다.
“손화중은 법정을 나가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인민(人民)을 위하여 진력 (盡力)을 하였는데 어찌 사형에 처하여야 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전(全), 손(孫) 등의 담력」,『時事新報』 1895년 5월 7일, 3면
전북을 바꾸는 힘! 새전북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