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인물 선양사업 활발

양대박 의병장 영정 봉안식, 남원 저존재 강일순 탄생지, 도종교문화유산 1호 지정, 동판 제막식 정읍 덕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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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인물 선양사업이 활발하다. 양대박 의병장 영정 봉안식이 남원 저존재에서, 강일순 탄생지, 도종교문화유산 1호 지정, 동판 제막식이 정읍 덕천면에서 열린다.





△양대박 의병장 영정 봉안식, 남원 저존재



충장공 청계 양대박 의병장 영정 봉안식이 29일 오전 10시 30분 남원 저존재에서 열린다.

영정을 그린 사람은 정단 김병건화백이다. 그는 홍익대 동양학과 1990학번이다.

양씨 충장공파 종친회가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 회장은 양해석 전 전북특별자치도의원이, 총무는 양윤식씨가 맡고 있다.

청계(靑溪) 양대박(梁大樸·1543~1592)은 평생을 시인으로 살았지만 의병장으로도 유명하다.

남원 출신의 청계는 아버지가 종3품 사헌부집의를 지냈음에도 서자라는 신분상의 한계로 일찌감치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시를 쓰면서 청계도인(靑溪道人)을 자처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양대박은 조선 중기의 문인학자이자 의병장이다.

남원 출신으로 양대박의 아버지와 두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청계는 낮에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히고 밤에는 병서를 읽기도 했다. 누군가 “태평성대에 어찌 병서를 읽습니까”하고 물으면 “통달한 선비라면 모든 책을 다 읽어야 하고, 모든 일을 다 알아두어야 하지요.”라고 답했다. 남원부가 선조 16년(1583) 광한루를 대대적으로 중건하자, “십 년 안에 불타 버릴 터이니, 성밑에 도랑을 파거나 진지를 쌓느니만 못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양대박은 1580년을 전후로 남원에서 곡성 청계동으로 옮겨와 정자와 여러 건물을 짓고 마을을 일구었다.

계곡과 하천을 이용한 수리시설을 통해 농지를 넓히고, 노비를 들여 병작 하는 방식으로 청계동을 경영했다.

이렇게 형성된 청계동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들의 훈련장소로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다.

양대박의 의병장으로서의 행적은 함께 의병 활동을 했던 양경우, 양형우 등 두 아들이 남긴 '창의종군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일기에 따르면 양대박은 1592년 4월 중순 남원에서 임진왜란 발발 및 동래 함락 소식을 듣고 부사 윤안성, 전라도관찰사 이광 등과 대책을 강구했다.

이광의 관군동원에 협조했지만 이광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보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했다.

남원의 광한루에 의병청(창의소)을 설치하고, 아들 양경우에게 무기의 제조를 맡겨 무기장인 여러 명을 찾아내 창극, 검 등을 제조하게 했다.

5월 초순에는 창의 격문을 작성, 남원 광한루에 올라 호남 각 고을의 수령과 사민에게 보냈다.

이어 이종사촌이었던 유팽로가 의병 모집책을 제안, 이에 응해 의병을 모집했다.

양대박은 짧은 시일 동안 3,000 의병을 모집했다. 이는 비록 그가 고위관리는 아니었으나 학식이 높은 인격자였고 호남에서 제일가는 재산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 막대한 재산을 아낌없이 의병의 결집에 사용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양대박의 의병은 고경명 의병 부대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양대박은 담양회맹 이후 호남연합의병에서 우부장을 맡았다.

이에 남원에서 온 의병들은 양대박이 대장이 되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소란을 일으켰다.

이에 양대박은 단상에 올라 칼로 단을 치며 “대사는 이미 결정되었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고경명, 유팽로, 양대박 등 우리 3인은 동심일체인데 너희들 역시 한 몸으로 받들어 시행함이 오늘의 동맹의 의로움이 아니겠는가”라며 설득, 군사들의 동요를 진정시키기도 했다.

고경명에 의병대에 합류한 양대박은 6월 하순 운암면 장곡 일대에서 일본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 의병을 이끌고 나가 승리함으로써 일본군의 호남진출을 방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전투에서 호남의 첫 전승을 기념키 위한 ‘양대박 장군 승전비’가 임실군 운암면 입석리에 자리한다.

섬진강의 상류인 이곳에 1만여명의 왜군들은 선박을 이용, 전주에 입성키 위해 구례와 남원을 거쳐 이곳에 주둔했다.

당시 사재를 털어 가족과 친척들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양장군은 의병 1,000명으로 이들에 항전, 첫승을 거둔 것.

양장군의 승전비는 당시 운암면 벌정마을에 세워졌으나 일제 강점기에 철거됐다.

이후 전적지마저 옥정호 축조로 인해 수몰됐다.

‘운암대첩’의 사적은 정조 23년(1799) 왕의 명으로 편찬된 '실기'를 바탕으로 전해진다. 이 가운데 양대박 장군이 직접 쓴 '정초토사고재봉경명첩', 아들인 양경우와 양형우가 쓴 '종군일기', 양형우가 쓴 '운암파왜도기' 등이 기본자료이다.

‘운암대첩’ 전후 상황을 요약하면 양대박 장군은 5월 말 담양에서 고경명 장군과 함께 호남의병을 결성했다.

6월 7일 남원을 출발해 담양으로 가 고경명 장군과 합세했다. 6월 11일 담양에서 의병을 이끌고 6월 13일 전주에 도착했다. 그 후 남원으로 돌아가 1,000여 명의 의병을 추가로 모집하고 6월 24일 임실 갈담에 이르렀다.

6월 25일 아침 전주로 가기 위해 출발하던 중 운암의 장곡에 진을 치고 있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왜군 만여 명을 공격해 대승을 거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전주를 향해 진군하던 중 6월 28일 금산전투에서 아군이 패하고 군수가 전사해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심한 하혈을 동반한 병이 났다. 이에 다른 지역에서 의병군을 이끌고 있던 고경명에게 병으로 군대를 이끌지 못함을 통보한 후 7월 초 병으로 사망했다.

1786년(정조 10)10월 전라도 진사 이진희 등의 상언에 의하여 병조참의로 추증됐다.

1796년 9월 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 병조판서로 개증됐다.

전남 곡성군 곡성읍에 청계동과 양대박장군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530번지에 자리한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양대박부자충의문(梁大撲父子忠義門)은 양대박과 그의 아들을 추모, 1796년에 세운 정려이다.





△강일순 탄생지, 도종교문화유산 1호 지정, 정읍 덕천면에서 동판 제막



증산 강일순 성사 탄생지 동판 제막식이 21일 오전 10시 증산 강일순 탄생지 정읍시 덕천면 신송길 64에서 열린다.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의 탄생지는 성사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해 전북특별자치도 종교문화유산 1호로 지정됐다.

대순진리회는 증산 탄생지와 인근 성적지 관련, 역사&;문화콘텐츠를 개발하며, 전북도와 정읍시 등과 협의, 생가 복원과 기념관, 휴게 쉼터도 조성할 방침이다.

전북특별자치도는 가치 있는 종교문화유산을 발굴, 지속 가능한 보존ㆍ활용 방안을 마련하고자 '전라북도 종교문화유산의 보전 및 활용에 관한 조례' 2023)를 제정. 사업을 추진해왔다.

심의 및 선정은 역사·건축·문화유산 전공 교수 및 종교인 등으로 구성된 심의위원들이 참여, 근대 한국 민족종교의 비조(鼻祖)로 불리는 강증산 성사의 역사·문화적 영향과 평가를 공인한 것이다.

현재 탄강지에는 관리동과 주차장이 완비되어 있다.

앞으로 대순진리회는 탄강지와 인근 성적지 관련 역사·문화콘텐츠 및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전북특별자치도 및 정읍시와 협의하여 생가 복원, 기념관, 시루산 둘레길, 우물 및 휴게 쉼터와 관련된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강일순은 1871년 정읍군 덕천면 출생했다. 일찍이 동학(東學) 교도가 되었으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에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원할 뜻을 품고 전국을 떠돌면서 유교·불교·도교·참위(讖緯:음양오행설에 따라 길흉화복을 점치거나 예언함) 등 여러 사상과 설(說)을 공부했다.

1900년 고향으로 돌아와 김제 모악산(母岳山) 대원사(大院寺)에서 수도를 하던 중 깨달음을 얻고 후천개벽(後天開闢)과 후천선경(後天仙境)의 도래를 선포하는 한편, 후천선경 건설을 위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했다.

1908년에는 약방을 열어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데 힘썼으나, 이듬해 3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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