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덕 28년 정해(丁亥, 1887)에 해월신사께옵서 본군 남이면(南二 面) 남참의리(南參議里) 남계천(南啓天) 김정운(金正運) 김집중(金 執仲) 가(家)에 왕(往)하사 포덕에 착수한 지 미기(未幾)에 교도를 다득(多得)하다.
(「익산종원 연혁」,『천도교회월보』189, 1926년 9월호)
위 내용에 따르면, 해월 최시형은 1887년에 ‘본군 남이면 남참의리’ 지금의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 남참 마을 남계천의 집을 방문하여 동학포덕활동을 했다. 또,「전라행」(『천도교회월보』167, 1924년 8월호)에서는 해월이 남계천의 집에서 21일 기도를 봉행했다고 한다. 이 두 사료는 ‘호남좌우도 편의장’ 남계천이 역사의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기록이다. 남계천은 1891년 3월에「본교역사」(『천도교회월보』23, 1912년 6월호)에 다시 등장한다. 즉
포덕 32년 신묘(辛卯, 1891) 3월에 호남도인 김영조 김낙철 김낙 봉 김낙삼 남계천 손화중이 내알(來謁)이어늘, 신사(神師; 해월 최 시형-주)가 말하기를 (하략)
이라 하여, 1891년 3월에 남계천을 비롯한 전라도 동학 지도자들이 충청도 공주(公州)에서 포덕 활동을 하고 있던 해월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이런 사실은『시천교종역사』(1915),『천도교서』(1920), 오지영의『동학사』(1940) 등에서도 확인된다. 김영조⸱김낙철⸱김낙봉은 부안(扶安) 출신이고, 김낙삼은 태인(泰仁), 남계천은 익산(益山), 손화중은 무장(茂長)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일대에 동학이 널리 전파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91년 5월, 동학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획기적인 일이 일어난다. ‘백정’(白丁) 출신으로 알려진 남계천이 해월에 의해 ‘호남좌우도 편의장(湖南左右道 便義長)’에 임명된 것이다. 이 사실 역시「본교역사」(『천도교회월보』23, 1912년 6월호, 아래 사진 참조)를 필두로 동학 계열의 모든 사서(史書)에 언급되고 있다.「본교역사」에 실린 내용은 후일 ‘해월신사 법설’에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김낙삼이 물었다. “전라도는 포덕이 많이 될 수 있는 정세이나 본 래 본토 양반이 아니다가 입도한 남계천에게 편의장이란 중책으로 도중(道中)을 통솔하게 하니 도중(道中)에 낙심하는 이가 많습니 다. 원컨대 남계천의 편의장 첩지를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신사(神師; 해월 최시형-주) 대답하기를 “(중략) 하늘은 양반과 상민의 차별 없이 그 기운과 복을 준 것이요 우리 도는 새 운수에 둘러서 새 사람으로 하여금 새 제도의 양반과 상민을 정한 것이니 라. 이제부터 우리 도 안에서는 일체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두지 말라. (중략) 우리 도는 두목 아래 백 배 나은 큰 두목이 있으니 그대들은 삼가라. 서로 공경을 주로 하여 층절(層節)을 삼지 말라. 이 세상 사람은 다 하늘님이 낳았나니 하늘 백성으로 공경한 뒤라 야 가히 태평하다 이르리라”하셨다.
(『한국사상선 16』, 창비, 2024, 232-233쪽)
양반과 평민, 천민 등으로 계층화된 신분제가 살아 있던 전제왕조 시절에 ‘백정’ 출신이 동학의 제2인자 격인 ‘호남좌우도편의장’에 임명되었으니 양반 출신 동학 지도자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반발에 대해 해월은 “설령 출신이 낮고 미미하다 하더라도 두령의 자격이 있으면 그 지휘를 따라 도를 실천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이는 해월이 시천주 사상에 입각하여 신분 차별을 극복하고 만민이 하늘처럼 대접받는 세상 건설에 부심(腐心)했던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렇다면, 남계천이 임명받은 편의장(便義長)이란 제도는 언제부터 시행되었으며, 그 역할은 어떠했을까. 18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해월 등 동학 지도부의 동향이 담긴 해월문집이라는 사료가 있다. (사진 참조)

남계천의 ‘호남좌우도 편의장’ 임명 사실을 전하는「본교역사」
이 사료는 1992년에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자리하고 있던 천도교 호암수도원에서 발굴된 것이다.『해월문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도인 중에서 특별히 편장(便長; 便義長-주) 4명을 임명하여 각처를 순 행(巡行)하여, 여러 접의 상황을 두루 잘 살피도록 하며(周察), 관의 지 목을 받는 도인이 있으면 안전한 곳으로 옮겨 살도록 한다.(安接) 의아 하게 여기는 자가 있으면 각별하게 잘 알아듣도록 깨우친다.(曉喩) 수시 로 드나들 때마다 깨우쳐서 진리와 정도로 돌아가도록 하라. 여러 접 (接)에서 접주의 가르침을 잘 따르지 않는 자는 엄하게 벌을 주도록 하 라(施罰). 그리고, 편장(便長)이 각처를 순행할 때에 도인들을 잘 깨우치지 못하여 오히려 문란하고 협잡의 폐단이 있으면 중한 벌을 면 하지 못하며 즉시 다시 임명한다. (1892년 8월 29일자「통문」)

편의장의 역할이 쓰여 있는 『해월문집』
위의 내용에 따르면, 편의장에게는 ‘순행(巡行)-주찰(周察)-안접(安接)-효유(暁諭)-시벌(施罰)’ 등 다섯 가지 임무가 주어졌져 있었다. ‘순행’이란 편의장이 동학 도인들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각 접(接)을 직접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주찰’이란 각 접에 가서 그 접에 속해 있는 도인들이 처한 전후좌우 사정을 상세하게 조사하고 살피는 것이다. ‘안접’이란 관의 지목으로 인해 불안에 떨고 있는 도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안정을 얻을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효유’란 잘못을 저지른 도인에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도록 잘 타일러 이해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상 네 단계를 거치고 난 뒤에 비로소 벌을 내리는 것을 ‘시벌’이라고 한다. ‘시벌’ 방법은 매우 특이했다. 즉, 잘못을 저지른 도인이 자신의 스승 격인 접주(接主)와 함께 해월 또는 대접주가 주재하는 육임소(六任所)로 불려가 ‘쌍벌죄’의 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 쌍벌 또한 강도 높은 교리강습을 15일간 받거나, 아니면 49일 수련을 함께 이수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인간적인 처벌법이 아닐 수 없다.
1997년 3월 16일, 필자는 남계천의 흔적을 찾고자 익산시 남전리 남참 마을을 답사했다. 남참 마을은 익산에서 군산으로 이어지는 전군가도(全群街道)를 따라 10분 정도 달리면 나왔다. ‘북참’이라고 쓰인 버스 승강장 근처 육교 앞에서 좌회전을 하니 바로 마을이 나왔다.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김홍식(金弘植, 70세)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김홍식 씨는 남참 마을을 비롯하여 가까운 마을에 남씨는 없다고 하면서, 일찍이 남삼덕이란 분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왜정(倭政; 일제강점기) 말기에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마을 유래에 대해서는 참의(參議) 벼슬을 한 분이 마을에서 나왔기 때문에 ‘남참, 북참’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했다. 남계천의 흔적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런데, 뜻밖의 장소에서 남계천에 관한 단서가 나왔다. 2010년 5월, 필자는 ‘국치 100년 다큐’ 제작차 KBS 취재팀과 함께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 현립문서관을 찾아갔다. 문서관 소장의 ‘미나미가(南家) 동학문서’를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미나미가 동학문서’ 안에는 놀랍게도 남계천의 이력이 쓰인 한글 문서가 있었다.(사진 참조)

야마구치현 현립문서관에 소장된 한글문서 안에는 남계천에 관한 이력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편의장은 남(南)씨요 본은 의령이요 거(居) 전라도
휘(諱) 자는 계(啓)자 천(天) 자요
자(字)는 경 자 운 자요
당호는 하자 송자요
계사(癸巳; 1893) 십이월 이십오일 선화(仙化; 사망함-주)요
이 한글문서 발견으로 남계천의 행적에 관한 의문이 풀렸다. ‘호남좌우도 편의장’ 남계천은 1892년 8월부터 교조신원운동 준비에 진력하는 한편, 1893년 2월의 광화문 복합상소와 같은 해 3월의 보은집회에 참여한 뒤, 그해 12월 25일에 사망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박맹수 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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