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때 전주에 거주했던 일본인의 삶이 드러나다

김창주, ‘조선에 전주가 있다’ 번역

기사 대표 이미지

전주전매국 판매계 주임 이즈노는 강원도 원주에 살던, 나가이 부부를 전주로 1923년 불러들인다. 나가이는 전주연초판매 지배인을 맡게 되는데, 이 회사는 대장정 2정목, 현재 워리단길의 다가여행자도서관 부근에 있었다.

이때 나가이는 새로운 취미 활동을 한다. 이를 수양단이라고 하는데 이스미 지사가 선두에 서고 흰 셔츠에 희민 머리띠를 하고 새벽 5시에 '요이사'를 외치고 대장정 거리를 한 바뀌 뛰는 것이었다.

'조선에 전주가 있다(펴낸 곳 신아출판사)'가 출판됐다.

이 책은 전주회(全州會)가 1979년 5월 일본 도쿄에서 발간한 '全州; 全州會創立第二十五年記念'을 김창주 전주문화재단 생활문화팀장이 번역했다.

전주회는 1954년 전주의 재조 일본인(전주에 거주한 일본인)으로 재일교포를 포함, 1979년 당시 모두 472명의 회원이 활동했다.

도쿄도와 인근 현에 228명, 지방에 244명이 거주, 전주 관계자 상호간의 친목을 취지로 복지증진을 도모, 사회적 향상의 협력 기관으로 목적을 두고 있다.

'시미즈에게 전주는 어머니가 태어난 곳이며, 자신이 태어난 곳이다. 현재는 전주의 웨리단길이라 불리던 곳에서 그의 부모는 마루야마 포목점을 운영했다.

유년 시절 시미즈는 가세, 마사코, 하세가와, 도미코, 하루에와 함께 어울려 놀았다.

이들은 붉은 매화 꽃잎을 물에 섞어 장미빛을 만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미즈에게 전주는 어머니의 고향이자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사이타미현에 살고 있는 나이키 야스요는

전주 대궁교(大宮橋, 다가교)를 건널 때 강물의 물이 얼마나 깨끗한 지 스케치를 하기 위해 하류까지 내려갔다고 했다.

도쿄의 호리 가즈마는 1838년부터 7년 동안 전주에서 원팔방당(元八方堂)약국을 경영했다. 그는 이리 목천포에서 태어나 일곱살 무렵까지 신태인에서 있었으며, 야소병원(예수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은 후 병이 나았다. 이때에 전주에 처음으로 왔다.

도쿄의 모리야마 노보루는 1909년 한벽당에서 수영을 하거나 소쿠리로 민물고기를 잡거나 하며 놀았다고 회고했다. 봄꽃 철이면 벚꽃터널이 생겨났고, 때론 돗자리를 깔고 술을 곁들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을이면 덕진연못에서 민물고기 잡기를 했다. 큰 잉어가 많이 있어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고전미가 풍부한 전주의 명소와 고적'엔 팔달정 산업장려관 등이 소개됐다.

'팔달정 산업장려관'엔 일제강점기에 전주에 있었던 건물로, 정확한 위치는 현재 전주우체국 인근, 옛 전주군청과 전라북도산업장려관이 있던 곳이다. 이 건물은 1930년경에 조선식산은행 전주지점과 함께 전주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특산품인 전주우산, 단선, 선자, 조선지, 고산 건시, 혹은 운봉의 칠기, 고창 도자기 등은 이 장려관의 자랑거리로 매년 만주나 화북 등지에서 견본(見本)시를 열어 그의 방면에 까지 큰 호평을 받았다.

옮긴이는 "처음 '전주(全州)'를 알게 된 것은 2006년 경으로 '전주 근대생활 조명 100년' 제1~2권을 발간하기 위한 기획편집 업무를 맡아 일하면서 부터"라며 "장명수 전주문화재단 이사장으로부터 복사본을 받은 이래 20여 년만에 번역, 이번에 마침표를 찍게 됐다"고 했다.

옮긴이는 전북대에서 사학, 대학원에서 한국음악학(작곡)과 문학인류학을 공부했다. 저서로 '전주미학' 등을 쓴 그는전주문화재단 창립 멤버로 2006년부터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다./이종근기자











전북을 바꾸는 힘! 새전북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