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해월 최시형 선생 사진이 실린 독일어판 『코리아』(1906년) 표지.
19세기 후반, 조선 민중으로부터 ‘최 보따리’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해월 최시형 선생은 1827년 3월 27일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황오동에서 부친 종수(宗秀)와 모친 월성 배씨(月城 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실부모하여 어려서부터 이웃 마을에서 머슴 생활도 하고 인근의 조지소(造紙所)에서 용공(傭工; 머슴) 생활도 하며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했다. 19세에 밀양 손씨(密陽 孫氏)와 결혼한 뒤에도 그의 생활 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33세(1859) 때에는 현재의 포항시 신광면 반곡리 검등골로 이주하여 화전을 일구며 생활했다. 35세 되던 1861년 6월, ‘경주 용담에 신인(神人)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수운 최제우를 찾아가 동학에 입도했다.
입도 후 해월은 매월 서너 차례 용담으로 찾아가 스승 수운의 직접 지도를 받으며 수련에 열중했다. 그리하여 조화(造化)라고 불리는 신비체험을 경험하고 스승 최제우의 허락을 받아 포교 활동에 나섰다. 그는 ‘검악포덕’(劍岳布德)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포교 활동에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1863년 7월에는 경상도 북부지역 포교를 책임지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8월에는 도통(道統)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최선생문집도원기서』와 『수운행록』 등 동학 초기의 교단사 자료를 비롯하여, 「정운구서계」와 「서헌순장계」, 『교남공적』 등 관변 자료 등을 상호 비교&;검토해 보면, 해월이 스승 수운으로부터 직접 ‘도통’을 전수받았다는 교단 측 주장은 검토의 여지가 있다.
동학 입도 초기의 해월은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의 21자 주문 수련과 포교 활동에 전념하면서 스승 수운과 그 가족들을 위한 경제적 후원에 정성을 다하던 인물로서 ‘유력 제자’ 가운데 1인이기는 하였다. 해월은 스승과는 달리 학문적 기반이 거의 없었다. 조실부모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관계로 학문을 제대로 닦은 적이 없었기에 한문(漢文)으로 된 스승의 저작(著作)을 중심으로 한 교리 수용보다는 주로 일반 민중들이 선호하던 주문 수련 중심으로 동학의 가르침을 수용하였다.
해월이 수용하고 실천했던 동학사상의 특징은 무엇일까? 주지하듯이, 동학 교조 수운이 1860년에 창도한 동학의 핵심사상은 시천주(侍天主) 사상으로 집약된다. 시천주란 모든 사람이 자기 안에 거룩한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는 사상이다. 해월은 시천주 사상을 민중들과 어울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적으로 해석해 냈다.
우선, 해월은 그 자신 ‘머슴’ 출신이라는 자신의 신분적 배경을 바탕으로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님처럼 하라’( 人是天이니 事人如天하라)를 생애를 일관하는 설법 주제로 삼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부귀 빈천과 노소 남녀, 적서노주(嫡庶奴主)의 차별 타파에 일생을 바쳤다. 백정 출신으로 알려진 전라도 익산(益山) 출신의 남계천(南啓天, ?-1893)을 호남좌우도 편의장(湖南左右道 便義長)으로 임명했을 때, 양반 출신 접주들이 반발하자 “설령 출신이 낮고 미미하다 하더라도 두령의 자격이 있으면 그 지휘를 따라 도를 실천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역설했던 일화는 해월이 시천주 사상에 입각하여 신분 차별을 극복하고 평등사회를 건설하려 노력했던 대표적 사례라 할 것이다.

「南小四郞 동학문서」 (일본 야무구치현립문서관 소장)의 남계천 관련 기록. 2010년 5월 필자 촬영
또한 해월은 시천주를 사람뿐만 아니라 만물에게까지 확장하여 “모든 만물이 하늘님을 모시지 않은 존재가 없다”(天地萬物 莫非侍天主)라는 범천론적(汎天論的) 시천주 사상으로 새롭게 해석해 냈다. 다음과 같은 설법이 바로 그것을 중명한다.
천지만물이 하늘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으니 능히 이 이치를 알면 살생을 금지 하지 않아도 자연히 금해지리라. 제비의 알을 깨뜨리지 아니한 뒤라야 봉황이 와 서 깃들고, 초목의 싹을 꺾지 아니한 뒤라야 산림이 무성하리라. (중략) 날 짐승 삼천도 각각 그 종류가 있고 털 벌레 삼천도 각각 그 목숨이 있으니 천지만 물을 공경하면 덕이 만방에 미치리라.
( 「대인접물」, 『한국사상선』 16, 위의 책, 216쪽)
내가 한가히 있을 때에 한 어린아이가 나막신을 신고 빨리 앞을 지나매 그 소리 가 땅을 울려 놀라서 일어나 가슴을 어루만지며 ‘그 어린아이의 나막신 소리에 내 가슴이 아프더라’고 말했다. 땅을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님의 살 같이 하라. (「성경신」, 『한국사상선』 16, 위의 책, 221-222쪽)
이처럼 해월에게 있어서는 “하늘을 나는 새도, 들판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도, 그리고 졸졸 흘러가는 시냇물도 모두 하늘님이었다.” 그리하여 해월의 범천론적 시천주 사상은 마침내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의 삼경(三敬) 사상으로 체계화되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해월은 1861년부터 1898년까지 38년간 수배자 또는 도망자의 처지였음에도 체포되기 전날까지도 새끼를 꼬는 일을 쉬지 아니하였다. 다음날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할 처지에서도 나무 심는 일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잠시도 쉬지 않는 그에게 제자들이 “이제 그만 쉬시라”하면 “하늘님이 쉬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하며 짚신을 삼거나 새끼를 꼬거나 나무 심는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 같은 해월의 모습은 말 그대로 ‘일하는 하늘님’의 모습 그 자체였다. 동학에서 말하는 “하늘님은 일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며 (중략) 따라서 일하는 사람만이 가장 하늘님다운 하늘님이며, 일을 하는 사람만이 가장 생명의 본성에 알맞은 생명 활동을 하는 생명주체”가 된다. ‘일하는 하늘님’의 모습을 그대로 체현(體現)한 해월이야말로 노동의 신성함과 즐거움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노동(일)의 진정한 가치를 역설했다 할 것이다.
다음으로 해월은 수운 재세 당시부터 도인 간의 ‘유무상자’(有無相資) 즉 ‘있는 이’(경제력 여력이 있는 이)와 ‘없는 이’ 사이에 서로 돕는 전통을 생활화하는 데 정성을 다했다. 수운 재세 당시의 ‘유무상자’ 전통은 동학을 비판하고 탄압하는 데 앞장섰던 유생(儒生)의 눈에 의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귀천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니 백정과 술장사들이 모이고, 남녀를 차별하지 지 아니하고 포교소를 설치하니 홀어미와 홀아비가 모이고, 재물을 좋아하여 있는 이와 없는 이들이 서로 도우니 빈궁한 이들이 기뻐하였다.(好貨財而有無相資 則貧窮者悅焉)(「동학배척통문」, 1863.12, 고딕은 필자)
해월이 초기 동학의 ‘유무상자’ 전통을 계승하여 그 생활화에 주력했던 사실은 이 선집에서 소개하고 있는 『해월문집』에 실려 있는 「을유통문」(1885), 「무자통문」(1888), 「임진신약」(1892.8.29.), 「임진통문」(1892.11.19.) 등에서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다. 이 가운데 「무자통문」은 대흉년이 들었던 1888년에 해월이 발송한 통문으로 동학 도인 상호 간의 ‘유무상자’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형은 배고픈데 아우만 배부른 것이 될 일이며, 아우는 따뜻하게 지내는 데 형은 얼어 죽는 것이 될 일이겠는가. (중략) 크게 바라건대, 모든 군자들은 해당 접중 (接中)에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자는 각각 약간의 성의를 내서 항심(恒心)이 없는 자로 하여금 한 해 동안의 가뭄 걱정을 면하게 해주고서 무극(無極)의 큰 원 천을 함께 닦는 것이 어찌 크게 좋고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무자통문」, 1888)
이처럼 초기 동학부터 1892-3년의 교조신원운동 단계에 이르기까지 해월에 의해 일관되게 강조된 ‘유무상자’ 전통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단계에서도 다음과 같이 실천되었다.
그런데 이때에 있어서 제일 인심을 끄는 것은 커다란 주의나 목적보다도 또는 조화나 장래 영광보다도 당장의 실익 그것이었습니다. 첫째 입도만 하면 사인 여천이라는 주의 하에서 상하귀천 남녀존비 할 것 없이 꼭꼭 맞절을 하며 경 어를 쓰며 서로 존경하는 데서 모두 심열성복(心悅誠服)이 되었고, 둘째 죽이 고 밥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도인이면 서로 도와주고 서로 먹으라는 데서 모 두 집안 식구같이 일심단결이 되었습니다. 그때야말로 참말 천국천민(天國天 民)들이었지오.(「동학란실화」, 『신인간』 34, 192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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