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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동학농민혁명의 시작, 고창 무장기포를 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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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동학농민혁명은 131주년을 맞이했다. 지난 1994년 100주년을 계기로 활발히 진행된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와 기념사업은 전라도뿐 아니라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까지 전국적으로 확산하여 그 위대한 역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민권 의식을 일깨운 거대한 물결이었다.

그렇다면 동학농민혁명의 시작과 전국적인 혁명으로 이어진 계기는 무엇일까?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항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공식적인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은 1894년 3월이며, 이때 전라도 무장현 동음치면(현 고창군 공음면)에서 일어난 ‘무장기포’가 그 출발점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동아출판사 등 8종의 고등학교 한국사 검정교과서에도 무장기포를 1차 봉기로 표기하고 있다.

당시 전봉준과 동학 농민군은 “나라의 근본은 백성에 있고,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가 태평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기치로 무장에서 포고문을 선포하며 전국적인 봉기를 결의하였다.

포고문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신하들은 탐욕과 학정으로 나라를 위태롭게 하니, 백성들이 의로운 깃발을 들고 생사의 맹세로 나라를 구하고자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그 당시 무장기포는 단순한 지역 농민봉기가 아니었다. 정교한 조직과 명분, 포교와 군량 준비 등 체계적인 준비를 통해 이뤄진 전국 혁명의 기폭제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이나 당시 정부 기록인 『수록』 등을 보면, 이미 3월 중순부터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에 수천명의 농민군이 모여 조직을 정비하고 대오를 갖췄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왜 ‘무장현’이었을까? 여기에는 몇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 동학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손화중이 무장 일대를 포교의 중심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 아래 수많은 동학교도를 조직화 할 수 있었다.

둘째, 개갑장터를 중심으로 한 교통·물류의 요지였으며, 우시장과 해창, 석포 등 유통의 중심지였다.

셋째, 극심한 삼정의 문란과 수탈, 소작농의 궁핍한 현실이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중의 절박함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동학사상으로 이어졌고, 손화중이 선운사 도솔암에서 석불비기를 탈취했다는 사건도 새로운 세상을 열 지도자로서의 상징성을 부여했다.

무장기포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의 불꽃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895년 1월 완주 대둔산 항쟁을 끝으로 동학농민혁명은 막을 내렸지만, 그 정신은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 항쟁’을 거쳐 ‘2017년 촛불혁명’, 그리고 최근 ‘빛의 혁명’으로까지 이어져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근간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 고창 무장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명확히 밝혀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앞으로도 무장기포의 역사적 가치를 바로 세우고, 동학농민혁명의 자주와 평등의 숭고한 정신을 지역의 자긍심으로 계승하며, 미래 세대와 함께 나누는 활동을 이어갈 것이다.

“고창 무장에서 시작된 작은 외침이 역사의 거대한 물결이 되었음을 기억하자.”/정기백 (사)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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