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음악창작극으로 부활한 여성 동학농민군 지도자 이소사
동학의 ‘시천주’(侍天主)는 사람과 모든 생명이 제 안에 하늘님을 모셨다, 즉 끊임없이 활동하는 범(汎) 생명 활동의 주체를 사람과 모든 생명이 제 안에 각각 모셨다는 뜻이다. ‘시천주’ 해설에서 수운 선생은 하늘님을 부모와 똑같이 모신다는 뜻으로 주인 ‘주’(主) 자를 풀이하고 있다. 하늘을 부모와 똑같이 모신다는 뜻은 거꾸로 부모를 하늘님과 똑같이 모신다는 뜻인데, 이는 바로 모시는 주체인 나와 모든 생명이 부모인 하늘로부터 생겨났다는 뜻이 된다. 부모를 똑같이 하늘님으로 모신다는 것은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도 똑같이 하늘님으로 모신다는 뜻이며, 어머니는 음(陰)을 아버지는 양(陽)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가부장제의 부정과 더불어 역사에서의 모권지배 사회, 즉 여성지배의 사회도 동시에 부정함을 뜻한다. 그것은 진정하게 수평적인 남녀평등, 즉 정음정양(正陰正陽)이 실현되는 이상적인 세계를 지향한다.
각비(覺非)라는 말이 있다. 깨달을 각(覺), 아닐 비(非), 쉬운 말로 ‘아! 그거 아니야!’라고 깨달았다는 뜻이다. 고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 365-427)이라는 시인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시 안에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라는 구절이 있다. ”어제 내가 도시에서 벼슬한 것은 잘못된 일이고, 오늘 내가 시골로 돌아와서 자연을 벗 삼아 농사짓고 사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는 뜻이다. 도연명이 각비를 읊은 것처럼, ‘어제 잘못한 것을 깨달았다’라는 말이 『동경대전』 「수덕문」이라는 글에 ‘한편으로, 지금 시골에 묻혀 사는 것이 옳다는 글귀를 읊었다’(一以詠覺非是之句) 라고 나오고, 「화결시」(和訣詩)에 ‘오류선생이 지난날 벼슬한 것을 잘못이라 깨닫고’(五柳先生覺非)라고 나온다. 수운 선생은 왜 이 ‘각비’라는 말을 썼을까? 이제까지의 자신의 삶이 잘못 살아온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진정한 새 출발이 가능함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각비(覺非)의 정신으로 동학에서 드러나고 있는 양성평등 사상과 그 실천의 역사를 들여다보자.
먼저, 동학은 한국 최초로 여성을 위한 경전을 만들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동학 경전에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있다. 한문 경전인 『동경대전』은 내용이 비교적 짧고, 한글 가사체 경전인 『용담유사』는 조금 길다. 왜 수운 선생은 한글 경전을 만들었을까? 여성들 보라고 만든 것이다. 조선 시대 여성 상당수는 한문은 터득하지 못했어도 언문(諺文; 한글)은 깨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여성들 보라고 한글 경전을 만든 것이다. 『용담유사』 이전에도 내방가사(內房歌辭)라는 한글 가사가 있었다. 부인들이 자식 가르치는 데 필요한 내용이라든지, 살림살이하는 내용 등을 담은 내방가사가 몇천 수 전해오고 있었다. 그 내방가사를 포함한 한글 가사 중에 가장 뛰어난 가사가 바로 『용담유사』이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 가사문학이나 여성문학을 공부하려면 이 『용담유사』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다음으로, 동학 최초의 신자(信者)는 바로 수운 선생의 부인 박씨(朴氏)라는 사실이다. 수운 선생은 1860년 음력 4월 5일에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는다. 초기 동학의 역사를 담고 있는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를 읽어 보면, 막 춥고 떨리고 온 세상이 쩌렁쩌렁하면서 계시가 내리는 장면이 서술되어 있다. 이 계시는 아주 길어서 1년 가까이 계속된다. 처음 계시를 받고 그것이 계시인 줄 깨달았을 때 옆에서 보는 부인 박씨에게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아! 우리 남편이 이제 헛소리에, 허깨비마저 보는 것을 보니 드디어 미쳤구나!” 그리하여 박씨 부인은 죽으려고 우물에 몇 번이나 투신하려고 했다고 한다. 두 아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점차 정신과 몸이 나아졌다. 그래서 수운 선생은 자기가 계시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였고, 그리고 그 계시받은 원형인 영부(靈符; 부적)를 붓으로 치고, 그것을 불에다 살라 가지고 남은 재를 물에 타서 마시면서부터 몸이 좋아지기에 이른다. 몇 개월 만에 선풍도골(仙風道骨)이 되었다. 그리하여 포덕(布德), 즉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널리 알려야겠다고 결심한다. 바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부인 박씨에게 지어준 가사가 「안심가」(安心歌)이다.
「안심가」의 첫 마디는 “현숙한 내 집 부녀 이 글 보고 안심하소”로 시작된다. 부인 박씨에게 이것을 읽고 안심하시오 라는 남편으로서의 간곡한 당부가 담겨 있는 표현이다. 이렇게 해서 박씨 부인은 동학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안심가」 는 「검가」(칼노래) 다음으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민중들이 제일 많이 부르고 다녔던 가사 가운데 하나이다. 「안심가」는 특히 부녀자들이 많이 불렀다. 「안심가」는 또한 「검가」를 제외하고 8편 가사 중에서 “십이제국 괴질 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 하여 혁명적인 내용이 극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가사이다. 동학 창도 당시, 조선왕조는 강력한 중앙집중적인 관료제 국가였다. 그런데, ’다시 개벽‘을 부르짖는 혁명적 내용을 담은 동학 가사가 경상도 일대를 뒤덮기에 이른다. 당연히 그 혁명적 가사를 퍼뜨린 수운 선생은 곧바로 지방관 및 중앙 조정의 감시와 탄압 대상이 되었고, ’좌도난정‘(左道亂正;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힘)의 죄목으로 체포당한 수운 선생은 1864년 3월 10일, 대구에 있던 경상감영 관덕정 뜰 앞에서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부인을 동학 최초의 신자로 만든 수운 선생 이야기는 『신인간』 1927년 9월호 기사가 뒷받침하고 있다.

부인 박씨를 감화시킨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신인간』 1927년 9월호
끝으로, 동학의 양성평등 사상을 말할 때 동학농민혁명 당시 장흥전투(長興戰鬪)에서 활약했던 여성 동학농민군 지도자 이소사(李召史, 1873-1895) 이야기를 빼놓고서는 성립이 안 된다. 장흥전투는 1894년 12월 12일부터 19일까지(양력 1895년 1월 7일부터 14일까지) 장흥 일대에서 3만여 동학농민군이 장흥까지 남하해 온 일본군 후비보병(後備步兵) 제19대대 제1중대를 중심으로 한 진압군에 맞서 싸운 동학농민혁명기 최후의 항일전(抗日戰)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12월 15일(양력 1895년 1월 10일)의 ’석대들전투‘가 바로 장흥전투의 중심을 이루는 전투로써, 이 ‘석대들전투’ 선두에서 농민군을 지휘했던 전설적인 인물이 이소사이다. 이소사에 관한 기록은 조선 정부군 우선봉장(右先鋒將)으로 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던 이두황(李斗璜, 1858-1916)이 남긴 『양호우선봉일기』를 비롯하여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1842-1921)가 남긴 「동학당정토약기」, 그리고 일본 신문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과 『코쿠민신문』(國民新聞)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코쿠민신문』 1895년 3월 5일자 「동학당에 여장부 있다」라는 기사에는 이소사에 대해 “동학당의 무리 중에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傾城之色)의 미인이라 하고 이름은 이소사라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말을 타고 장흥부(長興府)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 위에서 지휘를 했다고 한다”라고 전하고 있다.(아래 원문 자료 사진 참조) 이소사는 여성의 몸으로 어떻게 농민군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바로 동학이 한국 최초의 여성을 위한 종교로 등장했다는 점, 그 위에 여성들이 「안심가」를 비롯한 한글 가사를 통해 손쉽게 동학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에 즈음하여 ’근대한국의 잔 다르크!‘로 불리며, 동학농민혁명기 최후의 항일전에서 유일한 여성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소사가 마침내 부활하기에 이르렀다. 장흥에 근거를 둔 ’문화공간 에움‘(대표 서혜린)의 음악창작극 「석대들을 내달린 아름다운 꽃: 이소사」 가 바로 그것이다. 이소사에 관한 창작극이 「뮤지컬 명성황후」의 흥행을 뛰어넘는 날을 꿈꾸는 것은 비단 필자 개인의 꿈만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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