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동학·동학농민혁명사]`한반도 개벽 사상의 세계화' 가능성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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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대전환’을 꿈꾸며 1860년에 등장한 근대한국 개벽 사상의 선구 동학(東學). 2024년은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 선생 탄생 200주년의 해이자 그 동학을 사상적&;조직적 기반 삼아 일어난, 19세기 세계사에서 최대 규모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꼽히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을 구실 삼아 제국주의 일본이 도발한 청일전쟁 13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였다. 이에 학계를 비롯한 한국 시민사회는 동학 창시자 수운 선생의 탄신,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등이 지닌 세계사적 의미와 그 교훈을 찾고자 1년 내내 바쁘게 움직이면서 빛나는 성과를 창출했다.

2024년에 이루어진 성과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을 꼽으라면 과연 무엇이 있을까. 관견(管見)으로는, 동학에서 시작된 한반도 개벽(開闢) 사상을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동시에, ‘K-사상으로서 한반도 개벽 사상의 세계화’ 가능성을 탐색한 서적이 출간되어 시민사회로부터 비상한 주목을 받은 것이라 생각한다.

왜 한국 사회는 새삼스럽게 동학에서 비롯한 한반도 개벽 사상에 주목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아마도 생태계 파괴와 기후 위기 등 서구 근대문명이 초래한 병폐가 날로 악화하고 있는 지구적 차원의 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즉, 지극히 생태 파괴적이며 침략적인 서구 근대문명에 맞서 만인 평등과 만물 평등을 지향하며 ‘다시 개벽’의 새로운 문명을 열고자 등장했던 한반도발 개벽 사상으로부터 ‘문명의 대전환’을 위한 비전을 찾아내려는 한국 시민사회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다. 동학에서 비롯된 한반도발 개벽 사상에 주목한 대표적인 성과는 다음과 같다.



백낙청 외,『개벽사상과 종교공부』(창비, 2024년 2월)

박맹수 편저,『한국사상선 16: 최제우 최시형 강일순』(창비, 2024년 7월)

허석 편저,『한국사상선』20: 박중빈 송규(창비, 2024년 7월)

임우기,『문학과 예술의 다시 개벽』(도서출판 솔, 2024년 7월)

백낙청 외,『개벽사상과 종교공부 2: 세계적 K사상을 위하여』(창비, 2024년 11월)

녹색평론사,『녹색평론 188호: 동학운동, 자유무역 이후를 꿈꾸다』(2024년 12월)



한국 시민사회가 동학을 비롯한 한반도 개벽 사상에 주목하게 된 까닭은 한 평자(評者)가 남긴 다음의 글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조선 시대 말기와 근대 초입에 걸친 개벽 사상의 발원과 개화는 수천 년을 이어온 한반도 사람들의 삶을 그 뿌리부터 새롭게 혁신하려는 열망을 담고 있다. 하늘과 땅이 열린 우주의 시작을 선천 개벽이라 하고, 인간 삶의 혁명을 후천개벽이라 한다. 서세동점의 국제질서 아래서 기울어져 가는 조선의 혁신을 꿈꿨던 최제우와 최시형, 강일순의 삶과 사상을 통하여 생태 위기 시대의 새로운 대안 사상을 꿈꾸는 일이 우리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서구학문으로부터 출발한 영문학자로서 개벽 사상에 심취한 지식인 백낙청이 그려놓은 한국 사상사의 큰 그림 속에 개벽 사상의 거장들이 들어 있다는 점, 새삼 고마운 일이다.” (김준기,「개벽 사상의 뿌리 다시 읽기」,『제주의 소리』, 2024년 8월 13일자)

동학에서 비롯하는 한반도 개벽 사상에 주목한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1894년 당시, 조선(朝鮮) 인구 1,052만 가운데 무려 최소 2-3 백만 명 이상이 참여한 동학농민혁명이 지향하고자 했던 ‘혁명의 이념’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과연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닌 현대적 의의는 무엇인가를 탐구하고자 ‘사상(思想)으로서의 동학’에 주목하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고 판단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1860년 4월에 수운에 의해 경주(慶州)에서 창도된 동학이 1894년의 혁명으로 진화(進化)하기까지 동학이 단순히 ‘사상으로서의 동학’ 단계에 머물지 않고, 2대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에 의해 1870-80년대의 ‘조직(組織)으로서의 동학’ 단계를 거쳐, 1892-3년 두 해에 걸쳐 전개되었던 교조신원운동(敎祖伸&;運動), 즉 ‘운동(運動)으로서의 동학’의 단계를 통과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운동으로서의 동학’ 단계에서 해월을 정점으로 하는 동학 교단 지도부는 동학의 접(接)과 포(包) 조직 안으로 일반 민중을 안아 들인 결과, 마침내 동학은 1894년의 ‘혁명(革命)으로서의 동학’ 단계로 비약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일찍이 1931년『동아일보』에「동학과 동학란」이란 제목으로 동학농민혁명사 전반에 대해 연재한 적이 있고, 또한 1963년 황토현 고갯마루에 건립된 갑오동학혁명기념탑 비문(碑文)의 작자(作者)이기도 한 동빈 김상기(東濱 金庠基, 1901-1977) 선생이 그 비문 속에서 “동학의 조직망을 통하여 농민대중을 안아 들여 우리 역사상에 처음 보는 대규모의 민중전선을 이룩하고”라고 적시함으로써 동학이 ‘조직으로서의 동학’과 ‘운동으로서의 동학’ 단계를 거쳐 ‘혁명으로서의 동학’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선구적으로 언급한 바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2024년을 기념하는 성과가 단지 ‘사상(思想)으로서의 동학’을 기념하는 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사상으로서의 동학’에 기반하여 일어났던 갑오(甲午, 1894) 동학혁명, 즉 ‘혁명으로서의 동학’에 대해서도 선행연구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연구가 선을 보였다. 지수걸의『189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역사비평사, 2024년 9월)과 정선원의『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 연구』(모시는 사람들, 2024년 11월)가 바로 그것이다. 양자(兩者) 모두 제2차 동학혁명 당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간의 최대 격전이었던 공주전투(公州戰鬪)의 장엄한 전모(全貌)와 그 역사적 의의를 심층적으로 탐구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정선원의 연구는 공주전투에 관한 그간의 선행연구와 국내외 사료를 정밀하게 살피고, 공주 우금티 일대 동학 전투현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오던 구전(口傳)을 널리 채록하여 장엄했던 공주전투의 전체 상황을 완벽하게 복원해냈다. 당초, 동학농민군 진압 전담부대였던 일본군 후비보병(後備步兵) 제19대대는 작전 일정상 공주(公州)에는 하루 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 박사의 연구를 통해 실제로는 남북접(南北接) 농민군을 포함한 1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농민군이 공주 일대에 결집하여 조직적으로 항전한 관계로 제19대대의 작전 일정은 22일간으로 늘어났으며, 결국 29일간으로 예정했던 전체 작전 일정이 그 세 배인 90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요인이었음을 밝혀냄으로써 공주전투뿐만 아니라 동학혁명 연구사에서 새로운 지평(地平)을 열었다. 그러므로, “정 박사의 이 책으로 동학혁명의 전체상(全體像)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며, 정 박사의 저서를 읽지 않고서는 앞으로 동학혁명에 대해 제대로 논할 수 없을 것이다. 단언컨대, 정박사의 저서는 앞으로 동학혁명 연구의 전범(典範), 즉 교과서가 될 것이다.”(필자의 추천사)







한편, 2024년에는 청일전쟁 연구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가 이웃 일본에서 나왔다. 청일전쟁은 첫째 청국과의 무력전쟁, 둘째 서구 열강과의 외교전쟁, 셋째 조선(중국) 민중과의 전쟁이라는 중층적 측면을 지니고 있는바, 그간 조선(중국) 민중과의 전쟁이라는 측면을 주목한 연구는 부재(不在)해 왔다. 그런데, 그 세 번째 측면, 즉 조선 민중에 대한 일본군의 대량학살(大量虐殺=제노사이드) 실상을 1차 사료를 통해 실증해 낸『또 하나의 청일전쟁: 동학농민전쟁과 일본』(新版)이 일본에서 출간된 것이다.

/박맹수 (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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