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익두 전북대 명예교수가 ‘조선 명필 창암 이삼만 평전: 민족-민중서도의 길을 열다’ 등 2권의 책을 펴냈다.
조선 명필 창암 이삼만 평전: 민족-민중서도의 길을 열다(지은이 김익두, 허정주, 펴낸곳 민속원)’와 ‘한국 민요의 남도적 융합 순창 농요 금과 들소리(지은이 김익두, 허정주, 펴낸 곳 민속원)’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 명필 창암 이삼만 평전: 민족-민중서도의 길을 열다'
앞선 책은 조선 후기 조선의 3대 명필, 당대 중국과는 다른 조선의 독자적인 민족-민중적 서도의 길을 처음으로 개척해낸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 선생의 일생과 그의 서도(書道)ㆍ서예(書藝) 세계를 총체적으로 탐구한 저서이다.
양반 사대부 중심의 양반문화가 서민 백성 중심의 서민문화로 전환되는 조선 영조시대 중반에 정읍ㆍ전주ㆍ완주에서 삶을 영위하면서, 가난하고도 고단한 밑바닥 생활 속에서도 평생에 걸친 서도(書道)와 서예(書藝)에의 피나는 노력과 수도ㆍ수련을 통해서, 오랜 동안 중국 서도ㆍ서예의 그늘 밑에 속해 있던 우리나라 서도ㆍ서예를, 중국의 그것과는 다른 자주적인 한국의 서도ㆍ서예의 길, 그것도 우리의 민족-민중적 서도와 서예에의 새 길을 처음으로 개척해 놓은 사람이다.
그러기에, 창암(蒼巖)을 높이면 호남(湖南)의 서도ㆍ서예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서도ㆍ서예 전체, 특히 우리나라 근현대의 민족-민중적 서도ㆍ서예가 진정으로 높아질 것이고, 창암을 낮추고 업신여기면 호남의 서도ㆍ서예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서도ㆍ서예 전체가 지극히 낮아질 터이다.
지은이는 "사정이 이러함에도, 우리는 앞으로도 창암(蒼巖)을 말로만 떠들고 실제로는 그저 늘 어두운 그늘 속에 방치해만 둘 것인가. 아무쪼록, 이 책자를 통해서, 우리 민족이 낳은 조선 최고의 근현대 민족-민중적 명필 창암 이삼만 선생의 서도와 서예의 참뜻과 가치가, 뒤늦게나마 세상에 널리 제대로 알려지는 중요한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빈다"고 했다.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1786~1856), 눌인 조광진(1772~1840)과 함께 전북을 중심으로 활동한 창암 이삼만을 조선의 삼대 명필이라 불렀다.
창암의 작품은 조선후기 백하 윤순(白下 尹淳, 1680∼1741),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로 이어지는 소위 '동국진체' 맥락을 심화 확장시키면서도 독자적 작품세계를 구축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창암은 전북 서예의 자긍심이자 뿌리가 되는 인물이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줄곧 지역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생활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조선의 마지막 자락에서 붓 한 자루로 사대부가 아니라 인간 ‘이삼만’으로서 자신의 삶을 시대와 정면 대결해낸 사람이다.
이삼만은 자신만의 필법인 구름 가듯 물 흐르듯 막힘이 없고 자연스러운 행운유수체로 이름을 떨쳤으며, 중국의 서법을 배제하고 동국진체를 완성해 냈다는 평가받고 있다.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1862-1935)는 근대 인물 중에 참으로 아까운 인물이다. 나라가 망하면 큰 재목이 그 인물값을 하질 못해,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으면 대부분 노름에 빠지거나 음주에 빠져 일생을 허비한다. 하지만 개중에는 한의(韓醫)나 서화로 세월을 보낸 사람들도 있다. 석재선생도 예외는 아니어서 서화에다 마음을 두어 대구의 근대 전통 서화의 한 획을 그었다.
석재의 재주는 당대에 이름이 나서 대원군이 직접 불러 어전에서 즉석 휘호를 시켜 그의 실력을 검증하고 석재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는 전설이 전하기도 하고, 중국에 가서는 손문(孫文)을 만나 지었다는 시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젊어서부터 팔능거사(八能居士)라는 이름이 따라다닐 정도였으니 이는 시(詩), 문(文), 글씨(書), 그림(畵), 거문고(琴), 바둑(棋), 장기(博), 의술(醫)로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다는 의미다.
석재는 대구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안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워낙 머리가 좋아 주위의 기대가 컸다.
서석지는 전주의 이삼만에게 서예를 배워 대구에 전파, 서병오 등 서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호남의 예술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석재는 어릴 때 이삼만의 제자 서석지에게 글씨를 배운 후에 대원군과 추사 글씨의 곧고 강한 필법을 본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구사했다. 또 그림은 특별한 스승 없이 글씨와 같이 선이 굵고 호방한 운필로 사군자와 소나무, 연꽃 등을 주로 그렸다.

△'한국 민요의 남도적 융합 순창 농요 금과 들소리'
순창 농요 금과 들소리는 전북민요의 5개 민요권 중 ‘동남부&;산간분지 민요권’의 가장 대표적인 음악이다.
전북 동남부-산간분지 민요권과 전남 동북부 민요권 사이의 ‘경계지역’ 민요권에 위치하면서, 남도 육자배기토리 민요 창법을 기반으로 하여, 이북지역의 서도토리 민요, 서울-경기지역의 경토리 민요, 그리고 전북 북동부&;산간 민요권을 통해 내려온 우리나라 동부 메나리토리 민요 창법 등을 두루 융합한, 매우 독특하고도 창의적인 우리나라 토착민요 어법의 세계를 이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니라 농요 들소리의 한 독자적인 지평을 열어 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민요의 가창방식 면에서 보면, 그 노동요의 기능에 따라 가창방식이 독창 · 제창 · 교환창 · 선후창 · 제창&;교환창 · 선후창&;교환창 등으로 가장 다양하고 복잡하게 분화 · 전개되고 있어 그 가창방식 면에서도 우리나라 농요 들소리 가창방식의 만화경(萬華鏡)을 두루 구현해내고 있어서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순창 농요 금과 들소리의 세계는 한 마디로 이른바 육자배기토리를 기반으로 전국의 모든 민요 토리들을 두루 융합한 ‘한국민요의 남도적 융합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지평에서, 이 순창농요 금과 들소리는 우리나라 토착민요 중에서 가장 독자적인 무형문화 유산으로서의 차별적 특성과 의미와 가치를 확립하고 있다.
순창군과 순창농요금과들소리조본회가 예산을 지원하고, 전북대 농악/풍물굿연구소가 주관, 펴냈다. 이 책자의 작업은 2024년도 초반부터 1년 동안에 걸친 조사·연구·집필 과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금과들소리 공연은 넓은 벌판을 배경으로 힘든 농사일을 품앗이로 극복하면서 풍년을 기원하는 우리 조상들의 마음을 소리로 표현한 농요로 음계와 선법이 판소리의 우조 및 계면조와 일치하는 것이 다른 지역 농요와의 차이점인 것을 인정받아 지난 2005년 전라북도에서 유일하게 농요 부문에서 무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됐다.
지난 2017년 예능 보유자 이정호씨가 별세한 후 김봉호 회장과 윤영백 이수자를 비롯한 50여 명의 보존회원들이 그 뒤를 이어 보존 전승해 오고 있으며, 특히 금과들소리보존회는 지난 2019년 제59회 전북민속예술축제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 제60회 전국민속예술축제 전라북도 대표로 참가, 순창농요의 우수성을 전국에 알린 바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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