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빛은 어둠을 뚫고 솟는다. 어둠의 끝에서 빛은 환하다. 2024.12.15 강릉의 일출
1. 이제 시작,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국민들이 재빨리 쿠데타군을 물리쳤기에 망정이지, 지난 12월 3일부터 탄핵소추가 국회에서 가결된 12월 15일까지는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그 며칠 동안 광기, 기만, 자기확증편향 등 한국 기성 사회의 참담한 민낯을 볼 수 있었다. 유신독재와 전두환독재를 겪지 않은 세대에게 계엄 쿠데타 사태는 살아 있는 민주 교육장이었다. 그러나 끝난 게 아니고 이제 시작이다. 사안이 너무 명백하기에 헌재가 탄핵소추를 인용하여 대통령을 파면할 것으로 본다. 그러면 60일 안에 대선을 치뤄야 한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보수도 아닌 극우 "국민의힘"은 해체되고 민주당이 합리적 보수를 선언했으면 좋겠다. 진보가 의석의 2/3를 차지하는 나라가 있는가? 통상 서양에서 '진보라고 하면 사회주의 경향을 말한다. 필자 세대는 1980년대에 민주당을 자유주의정치세력이라고 불러었다. 87년 6월 항쟁 이후로 군사독재의 후예 세력들은 자신들을 보수라고 하면서 상대 민주당을 진보라고 불렀다. 진보 대 보수 구도는 조선일보 등이 군사독재와 후예 세력들을 정치적으로 세탁하려고 만든 구도였다. 그들은 보수도 아니고 극우 세력으로서 이번 쿠데타 사태 때에 보여준 것처럼 그저 권력과 부를 따라 움직이는 부패한 집단일 뿐이다.
기대보다는 우려가 컸던 MZ세대가 이번에 보여준 민주 의식은 나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이들이 헌재 탄핵 판결 후 대선에서도 민주행동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국회의원 국민소환권, 해체에 가까운 검찰개혁, 시민기소위원회 - 대배심제, 지역검찰총장의 지역단체장에 의한 임명권 또는 선출제, 총통제에 가까운 대통령제 개혁,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지방정부 수준의 지방자치 개혁..... 아직은 갈 길이 멀다.
2. 이미개벽이다
문명전환이 되고 있다. 내게는 화염병과 짱돌에서 촛불로, 응원봉으로 바뀐 문화가 개벽을 실감하게 한다. 동학꾼 말로는 이미개벽이다. MZ 아들, 딸에게 미래를 맡겨도 좋겠다. 급변적 전환은 없을지라도, 방 주인만 바껴도, 불의를 심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집회장에서 세대 교체를 느낄 수 있어 참으로 좋았다. 저항의 거대한 뿌리는 파시즘이나 여타 공포정치에 대한 의식화된 숭고한 저항성이 아니다.내 일상을 침범하지 마라는 몸의 반응에 따른 용기다. 우리는 그것을 내면화된 민주성이라고 부른다. 세계를 떠돌고, K-Pop을 듣고, 개인적이고(개인주의가 아니다.), 탈권위적이고, 80년대의 민중민족의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청년들이 저항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자유와 해방에 대한 이성이 아니라 K-Pop을 듣는 몸의 자유인 것이다. 이들의 저항은 기성의 저항론을 부끄럽게 한다. 지금의 저항은 확실히 탈계급, 탈민중적이다. 나는 언제인가 우리철학의 천&;지&;인적 사유를 해체해야 한다고 썼는데 지금 청년들에게 천&;지&;인적 사유는 기성의 맥락과는 전혀 다르다. 천지인은 "이미개벽"되어 있었던 것이다.
AI, e커머스, SNS, 기후행동, K-Pop, 학생인권조례, 페미니즘 등 청년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문화는 거대한 뿌리를 내리며 이미 문명을 전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탈권위, 탈계급, 탈민중민족, 탈세대적 문화가 "이미개벽"이었다. 둔감한 내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바라는 게 있다면 이들이 그 자신들의 대의후보를 기성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곳곳에서 내세우며, 한국정치와 사회를 더 깊고 넓게 개벽하는 것이다. 응원봉이 촛불과 다른 것은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속가능한 감시자로, 자유로운 저항자로 일파만파 연쇄파동으로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며 이 사회의 전 분야로 MZ의 민주가 확산되면 좋겠다.
높은 곳을 우러러보지 않고 거꾸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굽어보는 개벽정치를 기대한다. 이들의 정치는 의사당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대의자는 BTS, 로제이고, 유럽의 68혁명은 촛볼과 응원봉을 거쳐 K-청년개벽으로 이미 도래해 있었다.

왼쪽은 유럽68혁명 때의 바리케이트의 키스와 오른쪽 2016촛불 때의 하야키스(출처 오마이뉴스)는 사회문화의 차이를 보여준다.
3.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공포정치의 원천이다
이질적 타자에 대한 두려움! 공포정치를 획책하는 이들은 철도파업노동자, 트렉터 탄 농민, 오디션에서 펜덤을 부르는 가수,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혈기왕성한 MZ세대, 야당, 심지어는 동료인 여당패들까지도 이질적 타자였을 것이다. 평생 타자를 범죄자로 취급하고, 사실은 자신도 눈떠 보니 왜 대통령이 된지도 모르는 자에게는, 타자는 서로 북돋고 기르는 모심의 협력자가 아니라 도래하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나찌, 박정희, 전두환, 스탈린, 폴포트, 피노체트, 프랑코 등 20세기 파시트에게서 보는 것처럼 두려움은 공포를 확산시켜 지배하려는 광기를 부른다. 타자는 하나의 공동체로 결집해야 하는 전체여야만 한다. 우리는 그걸 전체주의라고 부른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 한 것은 사유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악은 평범하다는 뜻이다. 악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아렌트에게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사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유하는 자들도 악을 악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나는 "타자 없는 주체사유는 악이다"고 쓴다.
한때 아렌트의 연인이기도 했던 존재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히틀러를 민족의 영도자라며 자발적으로 충성하고 부역했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망각한 역사라며 존재를 갈구했는데, "존재seyn는 존재자seiende를 존재sein하게 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히틀러는 민족이라는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화신이었던 셈이다.
대동아공영론을 내세운 니기시 기타로, 국민교육헌장을 써 조국근대화의 파시즘을 제공한 박종홍, 일제뿐 아니라 전두환에게도 부역한 서정주 등은 철학자이며 문인이었다. 이들에게 타자는 동원되고 지배되는 전체를 이루는 구성요소일 뿐이다.
이와 전혀 다르게 임동확 시인은 <부분은 전체보다 크다>는 시를 썼다. 시는 타자와 타자의 만남, 부분이 감당하는 전체의 무게, 그 부분은 전체보다 크다고 절규했는데, 이는 주체를 강조하며 타자를 지배하려는 타자 없는 주체자들을 고발하는 시로 읽혔던 것이다.
4. 계약이 아니라 상호부조가 존재의 원리다
사회가 민중을 돌보는 게 아니다. 민중이 사회를 돌본다. 자본제 시대 사회계약설은 맞다. 맞다고 옳은 건 아니다. 추상적 사회계약설이 민중의 자치(자기통치)를 돈과의 폭력적 사회계약으로 둔갑시켰다. 성장이 주춤거리자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불확실성이 증폭되고 있다. 한국에서 있는 건 퇴행, 퇴진과 특검뿐이고 성장에만 기댄 전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기존 사유로는 전망이 없다. 개벽적 전망을 주는 고전이나 기성철학이 있는가 묻는다. 동학이나 생명사상도 마찬가지다. 암시나 발상은 있으나 실천전략은 없어 보인다. 자유와 평등의 확장은 개발과 성장에 기댔던 것이다. 생태가 그 자체로 자유와 평등의 확장을 주는 건 아니다. 일자리는 삶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즐거움, 행복, 사랑, 우정 등이 삶의 목적이다. 근대는 개발과 성장을 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다. 돈이 제1원인자인 사회다. 자본 대신에 사회를 선택하자고 마르크스는 외쳤지만 사회가 돈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라면 그런 사회주의는 폐기한다. 사회주의는 사람들과 사람들, 사람과 자연의 우애, 협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구나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통해서 사회주의를 이루자는 발상은 패착이 아닐 수 없다. 사회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생산력도 발전해야 하고, 사회적 소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과 국가가 강력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당과 국가가 무오류의 존재는 아니다. 19세기 사회주의 정신은 계승하되 19세기 사회주의 실천전략은 폐기되어야 한다. 사회 그 자체가 자유로운 존재를 구속하는 억압체다. 학력 및 혼인 등의 국가공인제, 법률, 계약, 사회복지망이 결정하는 삶, 시장의 법칙, 분업과 협업 ....등 사회 자체가 존재의 억압체다. 어떤 사람이 가진 사람다움은 존중되지 않고, 그의 학력, 의사, 변호사, 기사, 기술자, 미용사 등 모든 게 국가에 의해서 공인되어야만 한다. 좌우 모두가 그렇다. 사람들 사이의 우정, 연대, 협력, 상호부조가 사회인 것은 아니다. 상호부조는 생명과 존재의 원리다.
/강주영(건축시공기술사·목수·전 교육부 대표 시민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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