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아침] 판소리의 수수께끼를 풀다

기사 대표 이미지

판소리가 한국 국악계의 제왕처럼 군림하고 있다. 그러나 판소리의 실상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판소리는 신재효의 5마당(춘향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심청가)이 동편제와 서편제로 불려지고 있다는 정도 알 뿐이다. 판소리는 온통 수수께끼다. 판소리는 왜 일고수 일명창인가. 판소리는 노래인가 이야기인가. 판소리와 고전소설 중 뭐가 먼저인가. 판소리의 수요는 서민인가 양반인가. 왜 전라도 사투리로 부르는가 등이 베일속에 있다. 판소리는 소리꾼이 사설과 아니리, 발림을 섞어가면서 공연하는 일인극(一人劇)으로 재미있고 흥도 난다. 그런데 판소리 사설은 사자성어, 중국고전, 한문투성이 내용으로 가득 차 이해하기 어려운데 판각본은 모두 한글로 쓰여있다. 판소리는 소리꾼과 고수가 연행하지만 한글판본은 부르는 사람(唱者) 중심으로 만들어져 독자(讀者)에 대한 배려는 없다.

판소리는 완판본 경판본의 소설책으로 만들어졌다. 판소리가 처음에는 구전(口傳)으로 떠돌아다니는 통속적인 이야기(史話)였는데 점차 사람들이 흥미를 갖게 되면서 필사본(筆寫本)이 등장하였고, 필사본 판소리로 불려지다가 판각본(板刻本) 고전소설 책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각 판소리마다 수십 수백개의 판본이 있다. 구전의 사화를 필사하다가 자신의 감성과 정서에 맞게 첨삭하면서 서로 다른 이야기 판소리들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누구의 본(本) 판소리가 있고 이 본을 바디라고 부른다. 그래서 판소리는 지금도 입에서 입으로 전승(口傳)되고 사람에서 사람으로 대를 잇는 소리문화이지 책으로 배우는게 아니다. 소리꾼마다 사설과 아니리, 발림이 다르고 가창 방식에 차이가 있다.

판소리는 많은 소리문화가운데 한 장르다. 우리소리는 판소리 외에 민요, 가곡, 시조, 잡가, 타령, 산조, 염불, 무가 등 수없이 다양한 소리가 있다. 그런데 왜 판소리가 국악계를 장악하고 있는 것일까. 구전은 소리의 주인이 없는 대중이지만, 판소리꾼은 자기소리를 가진 주인이 있다. 소리꾼들은 대물림 계보가 있다. 계보(系譜)는 음악적 혈통이다. 판소리는 조직관리가 생명이다. 그래서 정통 판소리꾼들은 한때 전주 한옥마을에서 성행하였던 창작판소리를 제압하고 전주세계소리축제를 장악한 것이다. 판소리가 어떻게 태동하였을까. 판소리가 태동하던 조선후기로 돌아가보자.

판소리의 본격화는 1894년 갑오개혁 전후다. 첫째, 신분제 해체다. 갑오개혁은 봉건왕조 해체와 근대화 조항이 담겼는데, 노비제 폐지가 신분제 해체를 가져왔다. 노비들은 성도 이름도 없었는데, 이름을 갖고 평민 신분이 되었다. 둘째, 부세제도의 모순으로 삼정문란이 성행하던 시점이었다. 외척세력의 부정부패, 탐관오리 타락, 매관매직 등 사회부조리가 극심하던 때였다. 셋째, 봉건적 신분제 해체로 오로지 경제력이 신분상승을 견인하던 시점이었다. 화폐경제의 성장, 상품유통 발달로 중인계층이 등장하였다. 양반은 관직을 갖지 못하면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농민들은 농민지주와 경영형 부농으로 성장하던 때였다. 이때에 노비, 농민들은 신분세탁으로 유사양반층(類似兩班層)을 형성하였다. 한마디로 벼락부자, 졸부(猝富)들이 등장하였다. 흥보전의 흥보 놀보가 대표적인 졸부다. 흥보전에서 박놀부가 박첨지로 행세한다. 첨지(僉知)는 중추원 정삼품 첨지중추부사(中樞院 正三品 僉知中樞府事) 관직이다. 이 벼슬을 매관매직하여 유사양반으로 신분세탁한 것이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양반행세하려면 지식이 필요하였다.

당시는 경제력이 생존수단이었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허생은 가난뱅이 유학자였다가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된다. 박흥보도 그런 사례다. 허생같은 배고픈 서생(書生)들이 소리꾼으로 신종 직업전선에 뛰어든다. 서생보다는 몰락양반들이 현실적인 생계 수단으로 한글소설의 창작자로 등장하였다. 이른바 강창사(講唱師)다. 강창사는 한문소설류 이야기를 소리 창(唱)에 얹혀서 구연하는 자를 말한다. 강창사들은 한문소설을 판소리계 소설로 만들면서 한글소설 성행에 기여하였다. 강창사는 전문소리꾼, 가객, 소리광대로 불려졌는데, 주 수요층이 신흥부자(졸부)들이었다. 주로 경영형 부농 또는 농민지주인 천석꾼 만석꾼이 강창사들을 집으로 불러 들였다. 판소리는 시장경제의 원리로 유통되었다. 당시 사회는 조선후기 농업사회였다. 호남지방 농업경제력이 판소리의 상업적 유통을 진작시켰다. 그래서 판소리가 전라도 사투리로 불려진 것이며, 남원 48방의 순창과 남원 사이 적성강이 동편제, 서편제의 경계가 되었다. 그래서 운봉과 순창에는 송홍록, 박초월, 박유전, 김세종, 장판개, 이화중선 등 세기의 판소리꾼들이 살고 있었다. 이때 지방의 마당발 아전(衙前)들이 판소리의 마케팅을 담당하였다. 중인(中人) 신재효를 보면 판소리의 정답이 보인다. /송화섭(전 중앙대 교수, 호남문화콘텐츠연구원장)



전북을 바꾸는 힘! 새전북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