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1893년 3월 금구군 원평에서 대규모 집회 주도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풍암공실행록’을 새롭게 발굴 처음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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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불확실했던 전봉준 장군의 동학농민혁명 1년 전 행적이 새롭게 확인됐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이자 독립유공자인 풍암 이병춘(1864~1933)의 행적을 기록한 ‘이풍암공실행록’을 발굴해 알려지지 않았던 동학혁명 일부 과정을 확인했다.

이 책은 임실 접주 이병춘이 1911∼1915년 구술한 내용을 문하생 김재홍이 정리한 것으로, 이병춘의 손자인 이길호 천도교 전주교구장이 최근 재단에 기증했다.

이 책엔 ‘사월(四月)에 경회우 충청도 보은군장내(更會于 忠淸道 報恩郡帳內)하야 시설창의소(始設倡義所)하니 기시(其時)에 고부군 전봉준(古阜郡 全琫準)은 역회우 전라도 금구군 원평(亦會于 全羅道 金溝郡 院坪)이라’고 나와 있다. ‘4월에 다시 충청도 보은군 장내에서 모여 창의소를 설치하니 그때 고부군 전봉준은 또한 전라도 금구군 원평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내용이다.

음력 1893년 3월 11일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금구군(현 김제시) 원평에서는 동학교도들이 대규모 집회를 동시에 열었다. 이 집회들은 ‘척양왜척’ 등을 주장하며 1894년 5월 발발한 동학혁명의 전 단계로 여겨진다.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전봉준이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재단은 이 책을 통해 전봉준이 원평집회를 주도했고 교조신원운동 광화문 복합상소, 보은 집회 관련 내용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고 평가했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1894년 활동 장소도 밝혀졌다.

이 책은 1894년 10월 ‘至南原郡內眞田坊五山里權陽壽家’(지남원군내진전방오산리권양수가)라고 쓰여 있다. 최시형이 1894년 10월 남원군 내진전방 오산리 권양수 집에 도착했다는 의미다. 당시 이병춘은 최시형을 만나러 가던 중 전라도 진산에서 체포됐다가 탈출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병춘은 동학농민혁명 이후에도 최시형을 보좌하며 함께 움직였다.

재단은 이밖에 동학교도가 입도하는 방법과 시기, 접주로 임명되는 과정과 함께 농민군이 어떤 식으로 생계를 유지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했다.

이병춘은 1864년 2월 전라도 임실에서 태어나 1888년 동학에 입도했고 1892년 12월 대정으로 임명됐다.

1894년에는 접주로 임명돼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에는 천도교에서 천도교 전주 대교구장, 성도사 등 여러 직책을 맡았다.

이병춘은 최시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3대 교주 손병희, 4대 교주 박인호를 보좌하고 초대 전주교구장을 맡는 등 동학 지도부로 나섰다. 1919년 3·1 운동 때는 전북 총책을 맡아 전주 만세운동을 준비했고 서울 탑골공원 독립만세에 참여했다가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송금하다 다시 2년간 옥고를 치렀고 1933년 6월 사망했다.

신영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소장은 “동학교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동학농민혁명에 적극 참여한 이병춘의 기록을 통해 당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과 최시형의 동학교단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며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실이 기록돼 있어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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