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의 아픔이 자리한 곳의 선정비, 옛일을 반추한다

[완주 신리 파쏘봉 선정비 역사를 알아보니] 둑길 따라가면 전라우도 암행어사 조귀하 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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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鄭汝立, 1546~1589)은 현재 전주시 색장동과 완주군 상관면의 경계지점인 파쏘봉 아래 월암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589년 발생했던 정여립 모반 사건과, 이 사건이 촉발한 이른바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조선시대 전라도 차별의 시발점이 됐다.

파쏘라는 이름은 정여립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집터를 숯불로 지지고 파헤친 후 인공 연못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집 앞 들판도 파쏘들이라 불렸다고 한다. 파쏘봉 아래 옛 길가 바위에 새겨진 선정비들이 즐비하다. 편집자 주



신리(新里)는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상관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북쪽으로 전주시 완산구 색장동, 서쪽은 완주군 상관면 의암리와 마치리, 남쪽은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서쪽은 완주군 구이면 광곡리와 경계를 이룬다. 신리는 신원(新院)이 있었다고 해서 신원, 또는 새원, 서원이라고 명명됐다. 신흥(新興), 수월(水月), 상원신(上元新), 하원신(下元新), 상신광(上新光), 하신광(下新光), 어두(魚頭), 신세대지큐빌아파트 등의 행정리가 있다. 전라선 철도가 남북으로 통과하며 신리역이 있으나, 사람을 태우지는 않는다.

파쏘봉 아래 옛 길가 바위에 새겨진 선정비들이 즐비하다. 파쏘 주변 옛 신리 터널 입구엔 전라도관찰사 이유원(李裕元) 불망비(1853년), 전라도관찰사 원인손(元仁孫)과 전주판관 김광묵(金光&;) 불망비, 전라도관찰사 김경선(金景善) 불망비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유원은 1852년(철종 3) 2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2월 이임했다. '임하필기(林下筆 記)'를 지었고, 후에 영의정에 올랐다. 원인손은 1765년(영조 41) 12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영조 43년 7월에 이임했다. 재임시 전주에 큰 불이 나서(정해대화) 민가 천여호가 불탔다. 우의정에 올랐고 아버지 원경하, 동생 원의손도 전라감사를 지냈다.

김광묵은 원인손 감사 때에 전주판관으로 문과급제자이다. 김경선은 1843년(헌종 9) 12월에 전라감사로 부임, 헌종 11년 12월에 이임했으며, 형조판서에 올랐다.

그 위쪽으로 둑길 따라 30m정도 가면 묘역 뒤 바 위에 전라우도 암행어사 조귀하(趙龜夏) 선정비가 새겨져 있다.

그 옆으로 전라우도 암행어사 어윤중(魚允中), 전라도관찰사 이돈상(李敦相), 전주판관 이돈상, 전라도관찰사 조강하(趙康夏), 전라우도 암행어사 심상학(沈相學), 전주판관 민영직(閔泳稷) 등의 선정비가 새겨져 있다.

어윤중은 1877년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었을 때 현지를 조사한 후 올린 12개조의 개혁안을 통해 조세와 재정 문제에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주었던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개혁안에서 수취제도 전반에 걸친 개혁과 함께 궁중에 소속된 궁방전(宮房田)과 관아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하여 둔 아문둔전(衙門屯田)을 개혁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새로 뚫린 신리 터널에서 월암마을 쪽으로 조금 내려오 면 철길 아래 철조망과 배수로 건너 바위에 전라도관찰사 정원시(鄭元始)와 전주판관 김좌현(金佐鉉)의 선정비가 새겨져 있다.

더 내려가 월암마을 조금 못가서 정여립 공원에는 대한제국때의 관찰사 조한국(趙漢國)의 영세불망비와 전주군수 이삼응(李參應)비가 서있다.

조한국 선정비는 우물에 빠져 두 조각 나 있던 것을 꺼내 다시 세운 것이다. 조한국은 1900년(고종 37) 8월에 관찰사로 부임, 고종 40년 9월에 이임했다. 전라감영 책판을 모아 향교에 관리토록하여 오늘날까지도 존속할 수 있도록 했다. 의정부 참찬을 지냈다.

가장 먼곳에 판관 이창중 영세불망비(1778년)도 있다. 그의 아들이 이의상이고 손자는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이목연이다. 전라감영에도 판관이창중 불망비가 있다.



진동규 시인의 시 '댁 건너 대수리를 잡습니다'는 조선시대 기축옥사의 참혹상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정여립이)살던 집은 텃자리까지 파버렸습니다. 그 이웃까지 뒤집어 파서 앞내 끌어 휘돌아 가게 하였습니다. 깊고 깊은 소를 만들어버렸지만 그때 그 집 주인이 반역했다고, 그래서 전주천 물이 거꾸로 흐른다고, 북으로 흐른다고 소문내고 그런 속셈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댁건너 마을 사람들은 上竹陰 下竹陰하면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선비들의 죽음 그 떼죽음을, 서방바우 각시바우, 애기바우, 그 피울음을, 상댁건너 하댁건너 점잖던 자기 마을 이름 위에 불러보기도 해보지만, 어떻게 변명 말씀 한번 엄두를 못 내고 죽어 지내왔습니다.



그 집 뒷산 월암에 달이 뜨면 댁 건너 사람들은 월암 아래 소에 들어 대수리를 잡는답니다. 관솔불들을 밝히고, 주춧돌 기둥뿌리 항아리 깨진 것, 뭐 그 집주인 뱃속까지 빨아먹고 자란 대수리들을 잡는답니다. 일삼아 잡아내고 그런 답니다'



정여립은 정말 역모를 꾀했을까. 아니면 날조된 옥사(獄事)였나. 그의 대동사상은 좌절된 혁명 사상인가. 기축옥사(1589년)로 1,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후 호남 인맥의 중앙 진출도 가로막혔나. 1589년(선조 22) 10월에 전주출신 정여립이 모역을 도모했다는 고변이 황해도에서 올라왔다. 정여립은 모역자로 몰려 진안 죽도에서 죽고, 이 모역에 가담했다는 자들이 잡혀와 국문을 받고 처벌됐다.

이 해가 기축년이어서 이 옥사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정여립 모반사건, 기축옥사는 당시 정권에서 열세이던 서인들이 정국운영의 주도적 위치에 있던 동인들을 타도하려는 옥사로 확산되면서 3년간에 걸쳐 동인 1,000여 명이 희생됐다. 선조 8년 동서분당 후 최초의 대옥사이다. 이 사건으로 중앙정국에서 호남사림들의 위상이 약화됐고, 전라도 출신들의 중앙 진출이 억제되었으며, 전라도 향촌사회는 동서 갈등이 심화됐다.

이 사건은 조선시대에도 당색에 따라 진위여부를 놓고 시각에 차이가 있고 현재도 학계에서 역모가 실재했다는 설과 당쟁의 산물이라는 날조설이 맞서 있다. 전라도의 역사를 저항과 차대(차별대우)로 보는 경향이 있다. 조선시대 정여립 사건도 그런 차원에서 해석됐다. 그러나 전라도의 저항은 삶의 높은 질을 추구하는 변혁적 성향을 지녔다. 또 전라도에 대한 차대는 이 지역의 저력에 대한 중앙정부의 견제적 성격을 지닌다. 전라도 지역사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저항을 변혁으로, 차대를 견제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정여립 사건은 전라도 지역사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호남사림은 선조 때 주요 요직을 차지했으나, 선조22년에 사실 여부가 석연치 않은 정여립 모반사건이 터지면서 중앙정계에서 그 위상이 약화했다. 고려시대에도 나주·경주·개경세력이 정국 주도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난데없이 전라도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훈요십조’가 세상에 나와 나주세력이 퇴조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태조 왕건의 유훈이라는 훈요십조가 국가 문서고가 아닌 제8대 현종 때 최항 개인 집에서 나왔고, 제2대 혜종이 나주오씨 소생이며 최지몽 등 전라도 출신들이 활발히 활약한 고려 초 정치상황과도 잘 맞지 않아 그 실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돼 왔다. 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은 서인(西人)에 속했다가 그가 따르던 이이가 죽은 뒤 동인에 가담, 이이와 서인의 영수 박순·성혼을 비판한 뒤 선조의 미움을 사 낙향했다. 그의 모반사건은 정철 등 서인이 처리하면서 3년의 옥사로 이어졌다. 정여립 사건은 당파의 격돌이 불러온 피바람이기도 했지만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도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이후 호남은 '반역향'으로 지칭되면서 사회적 희생양이 됐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호남 사림이 타격을 입고 위축된 것은 사실이지만 정승·판서로의 진출이 막히거나 인맥의 황무지가 된 것은 아니다.

정여립 사건은 '훈요십조'처럼 실체와 관계없이 호남을 비하하면서 호남-비호남 사이 의식의 장벽을 둘러온 사건으로, 실체를 바로 보려는 노력 역시 전주에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전라도 지역사 정립을 위해선 왜 이런 역사가 반복되었는지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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