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전북]감영길과 동문길에서 마을조성의 혼을 생각한다

39회 전주이야기8 – 감영길과 동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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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일제강점기 시절 대정정으로 불리던 동문길은 이제 장소의 혼마저 사라져 가고 있다.





1. 장소의 혼이 없는 구도심재생



경기전 앞에서 팔달로를 넘고 감영을 지나 감영길과 동문거리로 왔다. 감영 앞 남쪽 도로가 감영로고, 감영길은 감영로와 북쪽 충경로(흔히 관통로)의 사잇길이다. 팔달로를 사이에 두고 서쪽은 서문교회에서부터 팔달로까지가 감영길이고(흔히 웨딩거리), 동문길은 팔달로에서 동쪽의 기린대로까지다. 감영길과 동문길을 더해 약 1.2km다. 1980년 10월 2일 전주 충경로(흔히 관통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지금의 감영길과 동문길이 구도심 전주의 핵심도로였다. 시청, 전북도청, 기타 관공서, 대학병원, 대학 등이 이 길 주변에 있었으나 시청만 남고 다 신전주로 옮겨 가고 대학병원은 북쪽 건지산 쪽으로 갔다. 지금은 전주천 서쪽의 신전주와 혁신도시가 구전주보다 더 크고, 공공기관도 밀집해 있다. 옛은 낡은 것이 아닌데 옛전주는 신전주에 밀려나고 있다. 신전주가 성장의 정신이라면 옛전주는 무엇으로 장소의 혼을 삼아야 하는가? 지금 전개되는 구도심재생사업은 조경과 환경정비지 마을 조성의 원리가 없다. 장소의 혼이 없는 낯선 설계가 미래로 가져갈 깊은 옛정신을 죽이고 있다. 어느 나라 설계인지 알 수가 없다. 미륵사지석탑이나 왕궁리 석탑의 조형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수는 없을까? 한옥마을 주변의 구도심은 한옥마을과 전혀 조화되지 않고 묵은 향기가 아니라 낡아가고 있다. 있는 것은 콩나물국밥과 비빔밥뿐이라는 자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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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대로 좌상 : 박다옥, 우상 : 식민지금융조합 - 현 선각사 가운데 : 일제 전주경찰서장관사 현 경성게스트하우스, 좌하 : 맨션1938, 우하 : 옛 식산은행 모습은 없고 현재 산업은행



2. 식민지 대한의 전주 대정정에서



광복전쟁기에 일제가 감영길과 동문길을 부른 이름은 대정정(大正町)이었다. 감영길과 동문길에서 장소의 혼을 되새기며 팔달로에서 사통팔달하고 북쪽의 기린대로에서 상서로웠으면 한다. 기린봉, 기린대로의 기린(麒麟)은 성인(聖人)이 이 세상(世上)에 나면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기린봉에 달이 뜬 것을 기린토월이라 하는데 기린이 여의주를 토하는 것이니 상서로움의 극치다. 기린은 용ㆍ거북ㆍ봉황과 함께 ‘사령(四靈)’이라 하며, 상서(祥瑞)로운 생명을 말한다. 전주가 상서로운 곳이었으면 한다.



지금의 여행자도서관 부근에 박다옥이 있다. 등기는 1929년이지만 1919년에 지어졌다는 말도 있다. 전라도 최초 서양식 콘크리트 건물이다. 잠시 1930년대로 돌아간다. 식민지 대한의 전주 대정정(大正町)을 걷는다. 일제에 망한 나라는 대한제국이지 조선이 아니다. 조선은 일제가 부른 이름이다. 지금의 감영길, 동문길이다.&;



대정정 박다옥 황금싸롱에서 가베(커피)와 아사히삐루(맥주)를 마신 동학은 대정정을 걸었다. 둘 다 쌉싸름하다. 축음기가 지지직 돌며 나팔관 소리통으로 노래가 나온다. 윤심덕이는 김우진이랑 현해탄에서 죽었다지. 남포등이 흔들린다. 포마드를 바른 머리카락이 머루 껍질처럼 빛이 난다.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 가는 곳 그 어디냐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윤심덕이 소리통에서 노래한다. 양장 차림 마담은 길가 창만 연신 두리번거린다.

뉘를 기다리느라 춘향이 목을 하고 그러오. 올까요. 잘 모르겠소. 왜요. 때가 아니니. 언제가 때랍니까. 낸들 알겠소. 기다리지 마시오. 오게 되면 올 테니. 거푸 마신 쌉싸름한 아사히삐루가 습한 바람에 취기를 올린다. 기린봉이 초사흘 달을 토해낸다. 그도 나도 초사흘 달을 안고 가슴앓이할 텐데. 광복이 오긴 올 것인가? 황금싸롱 박 마담에게 돌아갈까. 고향집에서 담근 탁배기나 한 잔할 요량으로 묵수는 12칸 신작로(현 팔달로)를 넘었다. 양장 우와기(윗도리) 자락이 제멋대로 펄럭인다. 애깨나 낳는 년은 유곽으로 가고 힘깨나 쓰는 놈은 신작로에 가더라. 운이 좋으면 동초제 소리꾼을 만나 소리 한자락 들으리라. 식민지 식산은행(현 산업은행)의 석조가 희끄므레하다. 여그가 식산은행이구나. 동학은 바지춤을 풀러 오줌을 갈겼다. 가보세 가보세 공북문을 나가 우금티에 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줌은 을미적 을미적거렸다. 싸전다리 너머 초록바위가 어둠 속에서 조선낫 같은 초승달을 베어 문다. 개똥아 개똥(김개남)아 으데 갔노 짚둥우리에 유시가 웬말이냐. 댓잎 푸르길래 봄인 줄 알았더니 엄동시한이로구나. 이상이 그랬다지!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금용조합(지금의 선각사)을 지나 동학은 동문지 사거리에서 길을 경기전 쪽으로 돌았다. 골목길 낮은 담장 사이 한옥 지붕에 초사흘 달이 걸렸다. ‘덴노헤이까 반자이 데쓰(천황폐하 만세) 내선일체 황군에 나가자’고 쓰여진 현수막이 날린다. 동학은 참을 수 없는 토를 느껴 어둑한 골목 한구석에 쏟았다. 세모 반듯한 모임지붕에 수직창을 가로 세로로 나누고 기단은 공구리(콘크리트)인 경찰서장 관사(지금 경성게스트하우스) 너머로 경기전이 드러났다. 전주부 경찰서장 관사(현 경성게스트하우스)를 지나 전동성당과 경기전 서문길로 들어섰다. 왕의 뜰에는 백일홍이 피고 백성의 골목길에는 탁배기 냄새가 저문 구월 하늘에 번졌다. 선술집 덧문 틈으로 장터 소리꾼이 소리를 한다. “쑥대 머리 적막 옥중에 찬자리요.....” 선자연 추녀 끝을 타고 도는 바람 같기도 하고, 그믐밤 대숲에 이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지” 젓가락 장단 추임새가 소리를 돋는다. 텁텁한 탁주보다야 쌉사름한 삐루가 아쌀하지. 만주로 가야하나. 만주보다는 상해로 가야 하나. 아니지 동경으로 가야 하나. 겨드랑이가 가려웠다.



그날이 오기는 왔으나 정신의 광복은 왔는가?



3. 들끓던 동문길의 새 광복을 생각한다



오늘로 돌아와 지금의 산업은행을 지난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 옛 전주 부영(府營)자리에 ‘조선식산은행’을 세운 곳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 박배엽(1957~2004)이 통째로 사서 문화공간을 만들자던 건물이라고 이 지역 문인 신귀백 선생은 '전주편애-133쪽'에서 회고한다.



전주에서 동문거리는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린다. 화구점, 구식 인쇄소, 서점, 헌책방, 표구점, 남한에서 제일 오래 됐다는 삼양다방, 선술집, 카페, 소극장, 갤러리, 가맥집이 지금도 영업 중이다. 그러나 옛 모습은 사라지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글만 보고 찾아왔다가는 실망하기 쉽다. 오래된 근대의 풍경을, 그 향기를 기억하는 이들만이 동문거리의 쇠락을 걱정할 뿐이다. 그렇더라도 이 거리에는 장년의 문인, 화가, 소리꾼, 통기타 가수, 장고잽이, 대금 연주자, 피아니스트, 기자들이 출입한다. 운 좋은 날이면 카페에서 이들의 난장을 공짜로 즐길 수 있다. 도대체 잰 체 하지 않는다. 예술을 한다고 폼을 잡지 않는다. 흥이 나면 놀 뿐이다. 그런데 인심이 참 야박하다. 그 좋은 난장 공연을 봤으면 맥주 몇 병이라도 놓고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냥들 간다.



한옥을 빼고 이른바 근대건축물로 옛 모습을 가진 건물이 동문거리 부근에 몇 개 있다. 일제 경찰서장 관사인 지금의 ‘경성 게스트 하우스’, 카페로 영업 중인 1938년에 지어진 다세대주택, 지금은 절집인 선각사로 사용 중인 ‘전북금융조합연합회’ 건물이 있다. 금융조합 건물은 1929년에 건축업자 아베라는 일본인이 건축했다. 그 이외에도 여러 곳에 일제 강점기의 건축물이 산재한다.



서문에서는 현제명이 노래를 했고, 감영길에서는 이응로 화백이 그림을 그렸고, 동문에서는 문인들이 글을 썼다. 그 사연들을 여기 다 적을 수는 없다. 신귀백이 쓴 「전주편애」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한 대목만 옮긴다.



“동문거리는 서점들 말고도 별 하나에 어린 추억을 말하는 시처럼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수 많은 이름들이 있다. 단어들이 합하여 문장을 이루듯 70년대를 전후로 생겨난 헌책방, 막걸릿집, 다방들이 동문거리를 이루었다. 가락국수와 단무지가 맛 있던 아리랑제과점, 두툼한 호떡을 팔던 장미호떡, 막걸리의 대명사 후문집, 백반을 팔던 한성식당과 경원집, 거시기 때문에 마이신을 사먹는 청년들이 많이 드나들던 조약국, 짬뽕국물이 끝내주던 동명각, 그리고 배고픈 연극배우들의 창작소극장 등 별은 셀 수 없이 많다. 80년대에 시청과 도청, 법원과 방송국이 나가면서 이곳 동문거리는 시절을 잃게 된다.” -신귀백, 김경미「전주편애」206쪽-



다음회에 계속



/강주영(건축시공기술사·목수·전 교육부 대표 시민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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