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망과 진보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신자유주의 열차가 멈춘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 곡성 기차마을 필자 찍음

7월의 동진강은 푸른 들과 어우려져 생명을 기른다. 생명들이 근대인간관, 근대자연관을 해체하고 전환적 돌파를 할 수 있을까? - 동진강 만석보터, 정읍천 태인천 두물머리, 필자 찍음 -
1. 평등을 위한 학(學)이 있는가
세상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 삶은 태어나 일하고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이다. 잘해야 몇 십 명의 사람들과 지내면서, 죽을 때는 가족 이외에 겨우 서너 명 남짓 남는다. 노동, 전쟁, 독재, 기후로 무참하게 죽어가는 이들과 생명에 대한 연민이 있기는 하지만 지식인이라는 껍데기에 달린 귀걸이 같기도 하다. 폭염주의보 속에 먹고 살려고 노동으로 땀을 한껏 흘린 후 막걸리를 마시고 나름 뿌듯해 하며 책을 들고 1쪽도 넘기기 전에 잠들곤 한다. 원하는 것은 간단하다. 주4일, 1일 8시간 주32시간 일자리를 쉽게 구하고, 그것만으로도 자녀 2명과 배우자 4인 가족을 부양하고, 노후 걱정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를 ‘적정생활’이라고 하자.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등이 이를 보장 못한다면 모두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불평등을 조장하는 소수를 위한 학문일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적정생활을 보장하지 못하는 정치체제라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 “경제학은 평등을 위해서지, 자원의 효율과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다”고 초등학교에서부터 가르칠 수 있을까?
남보다 잘 나고 출세하고,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부리고, 그런 것들을 뽐내는 것을 조롱하고, 추방하고, 불평등이 자라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문화와 삶을 가졌던 사회가 있었다고 문화, 인류, 고고학자들이 보고하고 있지만, "이 보시오. 그렇게 하면 불평등이 자라니 안 된다"고 하는 학(學)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욕망은 무엇인가? 잉여로부터의 욕망인가? 결핍으로부터의 욕망인가? 수많은 광고, 정치, 국가는 잉여와 결핍의 욕망 모두를 부추긴다. 잉여 욕망으로부터 결핍을 느끼게 된다. 물론 절대결핍자도 있다. 결핍도 잉여도 아닌 적정 필요의 욕망만으로 본다면 세계는 과잉생산에 도달해 있다. 그런데도 국가와 정치는 성장을 외치고 있다. 누구를 위해서인가? 모두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거짓말이다. 아무리 개인의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도 재산이 천억도 아니고 조가 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생각을 하면 사회주의가 대안으로 떠오르지만, 성장에서는 자본주의가 유리하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2. 민주란 ‘잉여를 위한 민주’다
자본주의는 잉여욕망을 능동적으로 생산하여 결핍을 느끼게 한다. 모든 매체가 잉여욕망의 도구다. 국가 또한 다르지 않다. 절대결핍이 아니라 잉여의 결핍으로부터 일어나는 충동과 욕망이 자본주의를 확대재산했다. 자본정치란 이 잉여욕망을 누가 잘 채워주느냐다. 이런 뜻에서 자본주의에서 민주란 ‘잉여를 위한 민주’다. 이것이 과연 민주일까? 잉여욕망의 경쟁정치가 민주정치의 본질이다. 잉여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누구인가가 절대결핍으로 내몰려야 한다.
잉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존재들의 충동과 욕망을 일으키는 것이 전환정치라고 생각해 본다. 누가 잘 하냐가 아니라 빈 공백의 지점으로부터 욕망을 생성해야 한다. 자본이 스마트폰, AI, 암호화폐 등으로 새 욕망을 생산했다면, 그와는 전혀 다른 빈 공간에서 스마트폰, AI, 암호화폐를 압도하는 욕망을 일으켜야 한다. 19~20세기에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혁명이 자본과 팽팽한 욕망을 일으켰으나 21세기는 그렇지 않다. 직접민주라는 논리로는 20세기 사회주의와 같은 열정적 욕망을 일으키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압도하지도 못한다. 혁명, 전환은 스마트폰에 의해 진압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 자본주의에서 욕망은 타자에 대한 폭력이 된다
모든 존재자들은 욕망을 생성한다. 욕망이 발생할 때 주체가 구성된다. 욕망이 없다면 주체가 아니라 단지 '물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욕망이 없는 물건일지라도 욕망을 생성할 수 있는 존재들에게 욕망을 생성하도록 유혹하기 때문에 물건도 욕망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욕망으로부터 주체가 사후적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생각에도 한계가 있다. 욕망이 주체를 구속하게 되어 주체는 욕망의 괴뢰가 된다. 결국 욕망을 통제하는 주체는 사라진다. 욕망은 주체의 부재를 낳는다. 욕망의 무한궤도에서 욕망의 기관사라는 주체가 탄생하기도 하지만 욕망의 괴뢰가 되어 주체가 부재하게도 된다. 맹목과 광신이 주체가 부재한 욕망이다. 생산과 소비의 욕망이 근대인이라는 주체를 탄생시켰지만, 생산과 소비의 괴뢰가 되어 주체가 부재하기도 한 것이다. 주체의 부재가 새로운 욕망을 낳고 새로운 주체를 구성한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나 니체의 '힘에의 의지' 들뢰즈의 '차이의 존재'로서 주체를 근대는 ‘자본의 괴뢰주체’로 만들었다. 욕망의 괴뢰주체가 되었을 때 욕망은 타자에 대한 폭력이 된다. 이제 주체와 타자의 마주침은 동일성의 복제와 확대가 된다. 파시즘이 지배하게 되고 빠가 출현한다. 그것이 성장 파시즘이다. 모든 녹색당이 탈성장인 것은 아니지만 녹색당이 소수당에 머무는 것은 성장파시즘을 압도하는 질적으로 전환된 새로운 욕망을 대중적으로 불러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욕망은 무엇인가? 새로운 욕망으로부터 근대인이 아닌 새로운 인간주체가 탄생하고 신생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필요를 충족하는 생산(이하 ‘적정경제’로 표기)에 도달해 있는데 더 많은 노동력과 소비자를 위해 지구에 환경부담을 주면서까지 인구를 늘리자는 견해에 동의하기 어렵다. 이점에서 탈성장이 기후위기를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늦출 수는 있다고 본다. 태양, 바람 등의 재생에너지 전환에 동의하지만 탈성장의 생산감축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적정경제는 자본주의에서 가능한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사회주의가 계획경제를 하더라도 총량적으로는 생산량을 늘리는 성장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회주의경제도 대안이 아니다. 어떤 국가도 탈성장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탈성장론이 윤리적 의미는 있지만, 탁상공론으로만 느껴진다.
탈성장의 적정경제, 평등경제는 어떻게 해야 가능한가? 국가적 사고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국지적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탐색의 과정에 있어서 '어떻게'라고 말할 능력이 필자에게는 없다
4. 진보의 폐기로부터 신생을
필자는 진보의 폐기를 주장해 왔다. 진보는 욕망의 현실 구현 성장으로 생각한다. 진보는 보수와 이항대립이 아니라 보수를 내포한다. 보수의 이항대립은 급진이지 진보가 아니다. 급진적으로 진보할 것이냐, 보수적 방식으로 진보할 것이냐다. 진보의 폐기를 주장한 것은 동학혁명, 독립전쟁, 4&;19, 전태일, 인혁당, 반유신운동, 5&;18, 1987년 6월 항쟁, 생태환경운동, 촛불,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의 훌륭한 저항과 정의의 역사를 '진보주의'로 계승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진보의 폐기는 저항과 헌신으로 살아온 모든 역사에 대해 청산적인 것, 단절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모셔야 한다는 것, 다시 의미를 얻는다는 것, 변혁운동의 새로운 차원으로 ‘다시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철학, 과학, 역사학, 생물학 등에서 '진보'는 제각기 다르게 이해된다. 다윈의 진화는 종들의 전개를 말하지 발전의 뜻이 아니다. 사회운동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항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의 뜻으로 진보가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좌파에서 진보의 종착지라고 말하는 공산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 자본주의에 공통된 생산주의가 생명주의, 생성주의, 탈성장론, 생태주의로부터 강력하게 도전받고 있다.
역사는 과거의 흔적으로 존재하지 역사 자체가 필연적으로 발전법칙을 가지고 스스로 운동하는 것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세계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500년이 넘는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진보는 인간의 무한한 완성가능성을 지향하는 운동으로서 파악하는 사유다. 그러나 근대의 이런 인간관, 자원의 대상으로서 자연관은 지금 시대에는 도전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생명운동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생명운동은 근대인간관, 근대자연관을 해체하고 새로 구성하자고 주장하는 것으로 읽힌다. 이 관점에 따르면 근대인간으로서 노동자(무산자)는 해체되고 새로 구성된다. 유산자도 마찬가지다. 무산자와 유산자의 해체는 새로운 사람의 신생이다. 그 나라는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닐 것이다.
/강주영(건축시공기술사·목수·전 교육부 대표 시민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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