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연이 쓴 45년 일기 국가문화유산 된다

국가유산청, 부안 유생 기행현이 1866년부터 1911년까지 쓴 ‘홍재일기’ 문화유산 등록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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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에 살던 유생 기행현이 23세이던 1866년부터 68세이던 1911년까지 약 45년 동안 쓴 일기인 ‘홍재일기’가 문화유산으로 등록된다.

국가유산청은 동학농민혁명 운동의 시작을 기록한 ‘홍재일기’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역사를 간직한 ‘부평 미쓰비시 줄사택’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 예고한다고 밝혔다.

‘홍재일기’는 부안군의 유생 기행현(奇幸鉉)이 23세(1866년)부터 68세(1911년)까지 45년간 작성한 7권의 일기이다.

19세기 후반의 부안과 전라도 지역의 ‘역사상(歷 史像)’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1책의 제목은 ‘도해재일기(道海齋日記)’이며 2책부터 7책까지의 제목은 ‘홍재일기(鴻齋日記)’라고 돼 있다. 일기에는 그동안 밝혀진 적 없었던 동학농민혁명기 백산대회(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린 대규모 군중집회)의 일자가 1894년 음력 3월 26일로 정확히 기록돼 있다.

또한 1866년부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기 전 30년 동안의 물가변동, 가뭄, 세금 등과 관련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어 자료의 가치가 크다.

1책은 '도해재일기(1866~1867)'라고 이름을 붙였고, 2책부터 7책까지는 '홍재일기(1868~1911)'라는 이름을 붙였다. 1년에 대략 2만 자의 분량으로 기록되었다. 1874년부터 1880년까지의 일기는 다른 곳에 적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현재로서는 행방을 알 수가 없다. '홍재일기'는 개인적 일상과 견문(見聞), 중앙의 민정(民政)과 각종 부세(賦稅) 행정, 매월의 미곡가(米穀價)를 비롯한 물가(物價)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기행현은 부안의 향유(鄕儒)로서 개인적 일상과 삼정(三政)의 대상으로서 민인(民人)의 실상을 기록했다.

기행현이 훈집(訓執)으로 사무를 맡았던 기간의 일기에는 조정(朝庭)과 감영(監營)에서 지방에 하달한 공문(公文)과 그 시행 과정에 대한 사례가 행정 일지(行政日誌)처럼 기록되어 있다.

특히 당시 유행하는 동요(童謠)와 비결(&;訣), '정감록(鄭鑑錄)'에 연원한비기(&;記), 풍수(風水)와 구산(求山)에 대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홍재일기'의 비결 가운데 1866년 9월 18일 ‘부결(浮訣)’은 최제우의 공초 내용에 언급된 '이재궁궁(利在弓弓)'과 매우 유사해 주목할 만하다. 최제우가 언급한 이재송송(利在松松)'과 '이재가가(利在家家)', 이재전전(利在田田)', '이재궁궁(利在弓弓)' 등은19세기 '정감록'이 유포되면서 민간에 널리 알려진 비결이었다.

부안에서 '이재궁궁을을지간(理在弓弓乙乙之間)'이라고 변용, 떠돌았다. 이처럼 '궁궁을을(弓弓乙乙)'을 비롯한 동학의 비결과 주문은 여러 형태로 변용되어 회자되고 있었다.

동학의 교세가 불과 30여 년 만에 확산된 데에는 '정감록'에 연원한 각종 비결에 깃들어 있는 ‘다의적(多意的)’ 의미를 수용하는 집단적 정서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비결보단 다소 순화된 형태로 동요도 유행하였다. 동요는 ‘일종의 암시를 담아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의도로 유포되기에 도참이나 비결과 동일한 기능을 했다.

'홍재일기'엔 1882년 임오군란 이후에 세태가 반영된 동요가 수록돼있다. ‘개국 이래 처음 겪는대흉년’이라고 회자된 1888년 무자대기근 이후 시대적 상황을 빗댄 동요와 1884년 ‘고부민란’과 1899년 ‘영학당의 난’과 관련된 동요도 확인된다. 기행현이 ‘금년동요(今年童謠)’라고 표기한 것으로 미루어 해마다동요가 유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홍재일기'엔 ‘비기’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는데, 기행현은 당시회자되고 있는 비기 가운데 치병(治病)의 방책(方策)이나 재앙을 피할수 있는 비법(秘法)에 대해 적어 두었다. 그런데 기행현은 이러한 비기를 대부분 예동에 사는 수원백씨와 교유하는 과정에서 접했다. 그들은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한 부안의 사족이었다.

기행현이 수원백씨의 집에서 본 비기는 대체로 '정감록'의 십승지와같은 피난처에 대한 내용이다. 십승지에 대한 기행현의 관심은 ‘구산(求山)’과 관련해서도 확인된다. 그의 십승지에 대한 관심과 명당 혈처를 찾는 구산은 불안한 현실에 대한 위로와 후손의 발복(發福)을 위한것이었다.

한편 '부평 미쓰비시 줄사택’은 일제강점기 미쓰비시 제강에 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이 합숙했던 공간이다. 연립주택처럼 여러 호의 집들이 줄지어 있어 속칭 ‘줄사택’으로 불려왔다. 국가유산청은 “광복 후에도 도시 노동자를 비롯해 다양한 계층의 주거공간으로 사용됐기에 삶의 흔적이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주거사(住居史)적 가치가 크다”고 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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