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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도의 귀향은 그 어느 금의환향보다도 뿌듯하다

전북에서 '계회도(契會圖)' 발견 거의 처음...소동도의 '계회도' 현존하고 있음 밝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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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선비 소동도의 '계회도(契會圖)' 존재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전북에서 '계회도'가 발견된 것은 거의 처음이다.

선비들의 계모임 그림 '계회도(契會圖)'의 한 장면 찬찬히 읽어본다. 수 백년이라는 간극은 그림과 나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이런가. 빛바랜 종이에 남겨진 연한 먹빛, 늘 등장하는 산과 나무와 바위, 해독 불가능한 시를 따라가다 보니 이내 지루해지고 만다. ‘화중유시(畵中有詩) 시중유화(詩中有畵)’라지만 시도 그림도 일상 너머의 ‘흔치 않은 것’이 된지 오래다.

푸념하듯 조선시대 산수화 정도로 지나치려다, 커다란 너럭바위에 둘러앉은 작은 사람들을 발견한다. 깊은 골짜기의 적막을 깨고 흥에 겨운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안개 자욱한 강 가운데 가느다란 배 한 척이 보인다. 저 배를 타고 바위에 닿으면 그이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고요한 수면을 헤치고 노를 저어 가 본다.

무얼하든 유능과 청렴을 자랑스럽게 여긴 소동도(蘇東道, 1592~1671)의 귀향은 그 어느 금의환향보다도 뿌듯한 것이었다. 그린 이를 알 수 없는 '소동도 계회도'는 바로 그의 귀향을 축하하는 잔치였다.

화폭 하단 참석자 명단을 보면 출사하지 않은 유학은 물론이고 전라도사를 비롯 전라도 관내 군수와 현감이 열 명이나 된다. 그만큼 평판이 드높았던 게다.

황해도관찰사 소동도, 전라도사 김덕헌, 김제군수 민도, 익산군수 송시도, 전주판관 권 완, 만경현령 전송, 무장현감 권 양, 흥덕현감 박이문, 용안현감 이광익, 함열현감 송규연, 옥과현감 정수석, 청암도찰방 김만익, 경기전 참봉 송유광, 그리고 소천민, 소문산, 이홍보, 조무, 송규문, 이익수, 이민좌,권조 등 모두 22명이 참여했다.

그림의 내용은 배경인 산수를 위주로 하고 있으며 계원들의 모습이나 계회 장면은 아주 작게 상징적으로만 표현돼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로는 계회의 장면이 배경인 산수와 대등한 비중을 두고 표현되다가 점차 계회의 장소도 건물 내로 바뀌고 계회의 비중이 커지면서 계원들의 모습도 크고 자세하게 그려졌다.

하단에는 참석자들의 인적 사항을 관계(官階)의 서열에 따라 적은 좌목(座目)으로 구성돼 있다. 화폭을 보면 주위를 감싼 산과 그 기슭 아래 가옥과 나무들이 널찍하게 퍼져 있어 정겨움이 넘친다.

이런 종류의 계획도에 주변의 백성들이 사는 풍경을 그린 건 희귀하다.마치 주민들 모두가 입을 모아 그의 귀향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외치는 듯하다.

그뿐 아니다. 화폭 상단에 굵고 강한 산이 어깨를 펼쳐 감싸준다. 익산에는 산다운 산이 430미터의 미륵산을 중심으로 253미터의 선인봉, 321미터의 용화산뿐이다. 아마도 장엄한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하여 멀찍이 떨어진 산을 끌어왔을 것이다.마지막으로 화폭 중앙 잔치 풍경을 보면 환영의 꽃만 보일 뿐, 무희나 광대는커녕 흔한 악기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음식조차 차리지 않았다. 그의 검소함이 참으로 심하고 또 심하다.

익산시와 익산시문화도시지원센터는 조선시대 익산의 대표적인 지성 중 한 사람인 면와 소동도의 문집인 '면와집(국역 김창호.박관규)'을 국역, 출간했다. '국역면와집'은 중세 익산 지성사 구축을 위한 작업의 첫 번째 결과물이다.

소동도를 시작으로 익산의 대표적 지성 소세양(蘇世讓, 1486~1562)(현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중), 소두산(蘇斗山, 1627~1693), 소휘면(蘇輝冕, 1814~1889) 등에 대한 국역 작업이 완료되면, 중세 익산 지성사에 대한 연구 기반이 갖추어질 것으로 보인다.

'국역 면와집'의 국역 및 원문 표점은 김창호 교수(원광대 한문교육과 교수, 사범대 학장)와 박관규 박사(연세대 국학자료실 고문헌 전문)가 공동으로 참여했다.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읽기 쉬운 번역을 지향하였으며, 무엇보다도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 한시의 번역이 돋보인다. 인명, 지명, 고사 등에 대해서도 충실한 주석을 붙여 독자의 이해도를 높이고 있다.

소동도는 율곡 이이의 수제자인 사계 김장 생의 문하생이자 인목대비 폐비 사건 때 벼슬을 단 념하고 고향인 익산에 낙향한 충절의 선비로서 인조반정에 이후에 출사, 의주부윤, 제주 목사, 황해도 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목민관으로서 명성이 높았으며, 영국공신에 녹훈됐다.

만년에는 고향인 익산에서 제산당(濟山堂)을 세우고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용서 윤원거 등 당대의 명사, 지성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인재 양성에 공헌하였으며 스승인 사계 김장생을 기리는 화산서원(華山書院)을 건립, 유풍(儒風)을 진작했다.



'병중에 감회를 써서 태수 형에게 바치고, 아울러 고을의 벗에게 주고서 화답시를 구하다.(病中書懷, 呈太瘦兄, 兼示洞中諸益, 求和)'



백발의 형과 아우 모두가 팔십이니

아침저녁 마주하며 지난 삶 얘기하네

말년의 고질병, 형은 아우가 가련타 하고

고을 맡아 효도한 일, 아우는 형을 부러워하네

영고성쇠란 원래 운수에 의한 것이니

우락(憂樂)을 가지고 다시 마음 쓰지 말길

생각하니 종형제 가운데 일찍 떠난 이 많으니

늦게 죽는 이 눈물 흐르지 않을 수 있으랴



나이 팔십의 노인이 이웃에 사는 사촌 형에게 보낸 시이다. 소동도의 본관은 진주이고 소세양의 형인 소세공(蘇世恭)의 증손이다.

젊은 시절 인근 연산(連山)에 있던 김장생을 찾아가 수학했다. 1617년(광해군 9)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인목대비 폐모 논의가 있자 돌연 귀향을 결심한다. 인조반정 이후 문과에 급제해 봉상시 부사, 공조 정랑 등을 지낸다. 나중에는 의주부윤, 제주목사 등을 지냈는데 선정과 청백(淸白)으로 이름으로 높았다.

은퇴 후 고향에 있을 때에는 광해군 때에 함께 낙향했던 송갑조(宋甲祚)의 아들 송시열이 찾아와 인사를 드리기도 한다. 김장생 문하에서의 수학, 송시열 집안과의 인연은 이후 익산 지역 유학 성격의 정립에 영향을 미친다.

위의 시를 보낸 대상은 수재(瘦齋) 소동명(蘇東鳴, 1590~1673)이다. 송시열의 제자로 평생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함께 했던 소두산(蘇斗山)의 부친이다.

소동도가 말년에 쓴 이 시는 지난 삶을 배경으로 한다. 소동명은 소동도보다 두 살이 많다. 두 사람은 임란(壬亂) 무렵에 태어나 일찍부터 고난을 겪었고 함께 학업에 정진하기도 했다. 벼슬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어린 시절부터 40대 중반까지, 그리고 60대 이후 노년의 시기를 고향에서 함께 보냈다.

은퇴 후 다시 고향에서 만난 두 사람에겐 늘 화제가 풍성했다.시가 오고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동도는 세상을 떠난다. 그로부터 2년 뒤 소동명도 세상을 떠난다.



소동도의 '연보(年譜)'는 두 사람의 일을 이렇게 소개한다.



“공(公)과 종형은 연세가 모두 팔십이었다. 매번 두 항아리의 술을 가지고 만나 시를 주고받았고, 안빈낙도하며 성정(性情)을 편안히 기르니, 당시 사림(士林)들이 존경하여 우러렀고 고을 사람들이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담박한 교유와 낙관적 삶의 태도, 이것은 인생의 마지막을 윤택하게 했을 뿐 아니라 후학과 지역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팔십 형제의 넉넉한 마음의 교류, 그리고 그것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내는 전통시대의 문화를 새삼 돌아보게 되는 오늘이다.

조선시대엔 남성들의 계(契)가 많았다. 어떤 공통분모를 기반으로 모임을 만들어 소규모 집단을 배타적으로 형성해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었다. 같은 관청에 근무한 동관(同官)계, 과거 합격 동기생들의 동방(同榜)계, 나이가 같은 관료들의 동경(同庚)계, 국가 행사에 함께 참여한 도감(都監)계 등이 있었다.

조선 전기에 많았던 관직을 기반으로 한 계회는 족자 형태의 계회도(契會圖)로 그려지며 결속의 증거가 되었다. 계회도는 계의 이름을 쓴 표제, 모임의 장면인 그림, 만남을 기리는 시문, 계원 명단인 좌목 등으로 구성된다. 계원의 숫자대로 같은 그림을 그리게 해 각자 보관했다. 계회도는 시서화가 한 화면에 있는 독특한 회화이자 기록물이다.

'계회도 (契會圖)'는 풍류를 즐기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조직된 문인 계회는 만 70세 이상의 원로 사대부로 구성된 기로회(耆老會), 기영회(耆英會)와 동갑이나 관아의 동료들로 이루어진 일반 문인 계회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두 종류의 문인 계회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주로 산이나 강가에서 열리는 것이 상례이나 경우에 따라서 옥내에서 열리기도 하였다. 계회도는 그러한 계회의 기념과 기록을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화공을 시켜 참가자의 수만큼 그 장면을 그려서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각자의 가문에 보관했다.

16세기를 ‘계회도의 시대’라 할 만큼 문인들의 계회는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유난히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개국 이후 150여 년의 세월 동안 조선은 숱한 정치적 홍역을 치르고, 새로운 사림 세력들이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성리학에 바탕을 둔 도학과 선비 본연의 모습을 찾기 위한 사회 전반의 유교적 시스템을 갖춰갔던 시기. 과거 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리들을 성리학적 틀 속에 안착시키고 지속적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 계회는 이 과정에서 정착된 문화 현상이었던 것이다.

계회도는 산수가 중심이 되고 정작 계원들이나 계회 장면은 아주 작게 상징적으로만 표현되는데, 항상 의관을 정제하고 있는 계원들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유교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속세를 벗어나 대자연에 흠뻑 취하고자 했지만, 조선의 성리학적 지배 질서에 포함된 이들은 결국 정치적으로는 행정 관료였던 셈이다.

현존하는 대표적 '계회도'로는 일괄 1986년 보물로 지정된 '이기룡필 남지기로회도', '독서당계회도', '성세창 제시 미원계회도', '성세창 제시 하관계회도', '호조랑관계회도, '연정계회도', '기로세련계도' 등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시를 알고 뜻이 맞는 지인들과 모임을 결성하고, 이렇게 약속을 정했다고 한다. 요즘 우리와는 어떻게 다른지 들어나 보자.



'살구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 차례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 서지에 연꽃이 피면 구경하기 위해 한 차례 모이고, 국화꽃이 피어나면 한 차례 모이고, 겨울에 큰 눈이 오면 한 차례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피어나면 한 차례 모인다. 모일 때는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며 술을 마시며 시가를 읊조릴 수 있게 해야 한다. (…) 그러는 사이에 아들을 낳으면 한턱내고 고을살이를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한 턱 내고 벼슬이 승진한 사람도 한턱내고, 아우와 아들 중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있어도 한 턱 내도록 한다'



듣고 보니 바쁘기 그지없는 현대인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철따라 어떤 꽃이 피는 지 놓치기가 다반사. 한 턱 내는 것은 경제적인 고려를 해 봐야겠고.무엇보다 여유로움이 일상이었던 옛 선비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겠다. 다산의 벗들이 모일 때 준비해야 하는 것은 술과 안주 외에 ‘붓과 벼루’라는데, 요즘 우리들의 준비물은?/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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