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목수이자 건축시공기술사며 날품팔이 노동자다. 신생전북 14회에서는 현장에서 집 짓는 일을 하며 느낀 것을 써 본다.
1. 고구려사람인가? 근대사람인가?
신석기시대에 움집을 지으면서 칡넝쿨이나 갈대 등으로 나무를 엮는 노동과 지금시대에 전기공구로 철강구조물의 볼트를 죄는 노동은 무엇이 다를까?
옛날에 &;생석회를 흙구덩이에 피워서 회반죽을 만들어 구덩이에 기둥의 기초(지정)를 만드는 것과 거푸집을 만들어 철근을 엮고 레미콘을 펌프카로 타설하는 지금의 노동은 어떻게 다른가?
&;따개비, 가축, 트렉터로 논밭을 일구는 것, 낫과 콤바인에 의한 추수, 서울을 가기 위해 한 달 여를 걷는 것과 , KTX를 타고 1시간 만에 도착하는 것....
1980년대 후반만해도 10억 공사내역서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주산 선수들 서넛이 며칠을 일 했다. 지금은 컴퓨터와 엑셀로 1명이 하루 만에 작성한다.
달라진 것은 단위 시간당 생산량 또는 산출량이지 사람의 노동은 달라진 것이 없다. 손 낫의 추수와 콤바인의 추수는 기술 진보를 나타내지만 그렇다 하여 노동은 변한 게 없다. 10명이 열흘 하는 노동을 한 명이 5시간 만에 끝냈다고 그 노동자가 나머지 9.5일을 놀며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분제를 빼고 말하자면 근대인들은 에너지 사용 덕분으로 덜 춥고, 더 먹고, 덜 더울 뿐이다. 인간 노동은 변한 것이 없다. 고대나 지금이나 실업자는 있다. 고대에도 정치와 소유의 문제였지 식량이나 물자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디올백과 짚가방은 사용가치가 같은데 교환가치만 다르다.
달나라를 가는 시대에 나는 나무 손잡이에 쇠 덩어리가 달린 망치, 끌, 톱 등의 수공구로 일을 한다. 물론 전기공구를 쓴다. 전기를 쓴다고 손 망치로 일했을 고구려 노동자와 내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 노동만 보면 나는 초기 철기인 고조선 후기, 고구려 초기 사람과 다를 게 없다.

손 망치, 끌, 톱으로 일하는 목수들은 근대인이 아니라 고구려 사람과 마찬가지다. 현대 철강구조물 노동이라고 달라진 것은 없다.
2. 노동은 그대로고, 생산교환관계만 달라졌다
&;마르크스는『철학의 빈곤』에서 이를 쉽게 표현했다. “손으로 빻는 절구는 봉건영주가 있는 사회를 가져오고, 증기절구는 산업자본가가 있는 사회를 가져올 것이다.” 내 세대의 사람들은 손절구, 마을방앗간, 미곡종합처리장(RPC &; Rice Processing Complex)을 다 안다. 손절구는 가족 소유로서 가족교환관계고, 마을방앗간은 마을 대동계 소유로 마을교환관계고, RPC는 자본의 소유로 다국적 곡물기업 카길이아 몬산토를 등장시켰다. 이 각각의 사회적 관계와 교환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될 것이다.
&;노동의 방식, 생산교환관계가 바뀌었을 뿐 주산놓기 노동이나 엑셀 돌리기 노동이나 차이는 없다.
&;장황한 사례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보 또는 진화는 없다고 말하고 싶어서다. 진보나 진화는 지구가 고요한 지난 몇 만 년 동안에는 맞을지 모르지만 6차생물대멸종의 멸종 앞에서 진보 또는 진화는 가당치 않다. 변이 또는 변화만 있을 따름이다.
왕정이 아닌 공화정으로, 세습 신분제 노예가 아닌 자유계약(?) 노동자(자유노예)가 된 것은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지만 손 망치와 전기 공구 노동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나의 영성 혹은 이성은 환웅, 노자, 묵자, 공자, 천부경...등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뭐하러 그런 글들을 새기겠는가? 이성과 영성이 진보 또는 진화했다고 말헐 수 있는가?
2023년 작년에 타계한 라트르는 "우리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고 했다. 사회, 지구자연이 서로 관계하는 방식(체제)이 다르다고 해서 날품팔이 목수 또는 노동자의 처지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마르크스가 간파한 것처럼 노동의 사회적 성격, 분업과 협업, 노동수탈의 방식만 달라진 것이다.
3. 기획노동, 몸노동, 신자유주의
&;레지스탕스에 참여하려다 사망한 시몬 베유가 "몸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철학"이라 한 것은 단순히 노동을 찬양한 것이 아닌 정치 같은 기획노동이 몸의 노동을 지배한 것을 질타한 것이다. 기획노동이 필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몸노동을 부리는 체제를 없애자는 것이다. 역사상의 사회주의국가 역시 공산기획이 지배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국제 협업과 분업을 비판하지만 신자유주의 때문에 세계여행, 해외직구, 값싼 해외 상품 등으로 얻는 수혜(?)에 대해서는 비판이 없다. 신자유주의 때문에 프랑스 와인을 즐기고 외제차를 탈 수 있다. 신자유주의 때문에 테슬라, 애플 등에 주식 투자도 가능하다. 아마도 신자유주의 핵심인 국제금융투자(투기?)를 거부하면 한국경제는 하루아침에 붕괴되고 말 것이다. 삼성, 포스크, 한전 등에 외국인 자본이 얼마나 있는지....!
&;이념은 이념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관철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할려면 미국 자본 스타벅스, 세븐일레븐, 일본자본 쿠팡, 기네스 맥주나 칭따오 맥주도 거부해야 한다.
&;나는 신자유주의 핵심인 노동유연화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대신에 정규직, 비정규직이 함께 쓰는 노동연합기금을 만들자는 것이고, OECD의 일부국가처럼 비정규직 노임이 정규직보다도 높아야 하고, 노동법에서도 비정규직을 더 우대해야 한다. 이는 노동유연화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다. 대기업은 명퇴를 하면 2~3년 월급을 얹혀주는데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노임이 높으면 왜 안 되는가? 이것이 하청의 고혈을 빠는 노동차별을 없애는 일이다. 자본주의를 하면 신자유주의든 구자유주의든 시장자유주의를 피할 길은 없다. 금융자본주의는 제국주의일 수밖에 없으며 세계화하지 않을 수 없다.
4. 자연에서 분리되지 않은 자치관리노동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용어가 무슨 문제랴. 마을자치주의라 하고 싶다. 마을코뮌이라해도 좋다. 편의상 자치마을이라 하자.
내 망치의 노동이 자연에서 분리되지 않은 자치관리 공유토지에서 이웃형제들의 집을 짓고 마을 공회당을 짓는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그런 시절이 고대에 분명 있었다. 아니 근대초에도 있었다. 북미선주민 사회는 그랬을 것이다. 지금도 아말반도의 유목민들과 동남아의 조미아사회는 그럴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내가 근대인이 아니고 고구려 사람이라 한 까닭이다. 고대국가라 하지만 사실상은 부족 또는 씨족 연맹체 였을 것이다. 국가는 전쟁을 대비할 때 왕성해졌을 것이다. 대개의 삶은 국가 단위나 국제적인 분업과 협업에 의존하지 않고 마을에서 자치자급되었을 것이었다. 마을이 생산하고 마을이 소비하고 마을에서 모든 삶을 유지하지 않았을까? 마을은 공장이자 소비처이자 삶의 터전이였다. 직장과 생활하는 마을이 분리된 것이 근대의 비극이다. 이로부터 개인이 출현했다. 개인의 발견은 좋지만 호혜적 상호부조의 연대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것은 비극이다.
&;연합의 연합에 의한 국가란 고대부족연맹국가와 다르지 않다. 국가는 약하고 마을은 쎄야 한다. 적을 과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이 아니라 많을 과의 소국과민(小國&;民)이어야 한다.
&;마을에 의존하고, 마을 사람과 함께 일하고, 마을 사람과 더불어 놀 수 있는 것은 고대가 더 풍성했으리라 추측한다. 고독한 개인이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과 마을동무들과 어울려 노는 것 중에 어떤 게 나은가?
옛날에는 삶의 조건이 마을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었을 테다. 4년에 한 번 투표하는 국가보다도 마을이 내 삶과 더 가까워 지는 것이 필자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본다. 정읍 사람 강증산이 말한 "원시반본"은 땅 파 먹고 살자는 게 아니라 인간관계의 바탕을 국가나 국제적 분업과 협업이 아니라 마을에 두자는 것이다. 이로부터 거대한 문명전환이 하루하루 일어난다.
&;그래서 옛 전통의 하나이고 지금도 시골마을에서 유지되고 있는 마을공유지를 인구 1인당 1평씩 두자고 제안한다. 공유지란 마을 사람의 자치관리 아래 마을의 생필품을 생산하는 마을작업장, 마을돌봄, 마을문화 등을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것을 말하지 전답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도시마을마다 경로당, 주민자치센터 등은 있지만 소수가 이용하는 동아리방 수준이다. 특히 생산과 판매 기능이 없다.
&;국제분업과 협업을 거부하자는 뜻이 아니다. 내 마을을 주춧돌로 할 때에 그 어떤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도 혹은 그 반대도 타고넘을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시대의 마을&;자연&;인간들 사이의 얽힘을 신생하자는 것이다. 간디가 간파한 것처럼 마을은 세계의 바탕이다. 대한민국은 3500여 개 읍면동 마을의 연합이다.

집짓기는 마을 축제여야 한다. 근대가 발견한 개인은 좋지만 호혜적 상호부조의 연대하는 마을이 사라진 것은 비극이다. 사진 : 영화 위트니스의 장면
/강주영(건축시공기술사·목수·전 교육부 대표 시민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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