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요섭 연재 순서
1. n개의 새만금 n개의 전라북도
2. 또 다른 전라북도는 어떻게 태동하는가?
3. 개벽적 지역주의: 그늘이 지역을 바꾼다
4. 포스트성장시대의 인구·경제 패러다임
→5. ‘활생·활명 운동’과 ‘네오휴머니즘’의 성지
2024년 새해 1월 정읍의 독립서점 <작은새책방>이 운영하는 독서모임에서 『세계 끝의 버섯』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독서모임을 안내하며, 내건 문구가 ‘우주의 배꼽’ 정읍에서 읽는 ’세계 끝의 버섯‘이었다.
세계 끝의 ’전북‘
『세계 끝의 버섯』의 저자는 미국 오리건 주의 벌목된 숲에서 일어나는 ‘야생 버섯 무역’이라는 사건의 연쇄를 이야기하며 이렇게 묻는다. ”산업화의 약속이라는 유혹과 그에 따른 붕괴를 넘어, 훼손된 풍경에서 창발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처음부터 그것은 전 세계의 붕괴와 관련된 일이었다.“(47쪽)
그렇다. 우리는 기후재난과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의 전쟁, 극단적인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사생결단식의 정치적 쟁투, 그리고 외로움과 우울감, 출산 거부의 전 지구적 전염을 경험한다. 근대 산업문명 붕괴의 순간을 목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북은 또 하나의 세계 끝이다. 한국이라는 일국적 자본주의 체계의 내부 식민지로써 식량과 노동력을 무한정 제공했다. 그러나 산업화의 약속을 체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전북은 분명 특별히 낙후됐다. 지역내총산(GRDP)과 1인당 소득도 전국 17개 시도 중 각각 12위와 14위로 전국 최하위권이다(2022년 기준). 숫자 그 자체는 사실이고, 전북의 정치권과 언론들은 그 사실들을 매번 ‘확인 사살’ 한다.
그리고, 2024년 1월 18일 축포를 쏘며 전북특별자치도가 출범했다. 특별히 낙후됐기에 ‘특별한 개발’을 요구했고, 중앙정부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얻었다. 분명 개발도 필요하다. 그러나 개발, 다시 말해 발전과 진보는 하나의 ‘역사적 형식’일 뿐이다. ‘개발 전북’은 전북이라는 다중우주적 세계의 한 부분일 뿐이다.
『세계 끝의 버섯』의 저자에 따르면, “진보는 서로 다른 종류의 시간을 하나의 리듬에 맞추면서 전진해나가는 행진이다."(53쪽) 개발과 발전과 진보는 다른 삶의 리듬을 허용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다중우주적 세계를 파괴한다.
낙후된 풍경에서 창발하는 것은 무엇인가?
”훼손된 풍경에서 창발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계 끝의 버섯』의 저자가 다시 묻는다. 나는 그것을 살짝 비틀어 읽는다. ”낙후된 풍경에서 창발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이유는,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생명의 세계에서 ’끝‘은 시작이고,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처음과 끝이 하나인 진보의 직선적 ’시종(始終)의 시간‘이 아니라, 다중의 생명 리듬과 함께 ’끝이 곧 시작‘이 되는 ’종시(終始)의 시간‘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은 변방에서, 가장자리에서 일어난다. 복잡계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새로운 질서는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생겨난다. 130년 전 1894년 갑오 동학농민혁명은 ’변방 혁명‘의 대표적 사례이다. 21세기의 가장자리 혁명을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까?
전북은 산업화와 근대화의 변방 중의 변방이다. 근대적 세계의 끝이다. 종말과 붕괴를 향해 치닫는 근대세계의 끝은 이제 시작일 수밖에 없다. 한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소외와 낙후가 축복이 될 수도 있다.
극소수의 급진적 생태주의자들만이 아니다. 생명·개벽사상가 김지하만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생태문명과 생명사상을 이야기한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활생(活生) 문명‘을 제안한다. 더욱이 우리는 전북특별자치도의 도지사와 연구자들이 특별한 정책으로 ’생명경제‘를 제안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만국활계의 비결이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 대한민국 중에서도 후천개벽의 땅인 전북특별자치도에 나올 조짐이다.
만민활계(萬民活計) 전북도, 만물활계(萬物活計) 전북도
萬國活計南朝鮮(만국활계남조선) 淸風明月金山寺(청풍명월금산사)
文明開化三千國(문명개화삼천국) 道術運通九萬里(도술운통구만리)
”온 세상을 살릴 계책이 조선 남쪽에 있다.“ 만국활계남조선은 조선시대 비결서들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지만, 이를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에 불러낸 것은 김지하(1941-2022)였다. 김지하는 판소리 형식의 문학작품 『대설 남(南)』에서 남조선 사상의 대서사를 펼친다. ”정읍이 우주의 배꼽이다.“ 남조선사상의 현장이 전북의 금산사였고, 또 정읍이었던 것이다.
생태적 파국과 근대문명의 종말에 대한 위기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만국(萬國)‘을 살릴 계책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게 한다. 다보스포럼과 세계사회포럼, 유엔과 국제기구들이, 초대형 기업 연구소들과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묻고 또 구한다. 그렇다. 이제 나라를 살리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기후재난 속 ’만민(萬民)‘을 구해야 하고, 나아가 생명과 비생명을 아울러 ’만물(萬物)‘을 살려야 한다. ’만국활계‘만이 아니라, ’만민활계‘와 ’만물활계‘가 절실하다.
그것은 다시 ’생/명‘의 문법을 따라 두 개의 차원으로 나눠진다. 드러난 생명과 숨겨진 생명, 즉 ’활생(活生)‘과 ’활명(活命)‘이 동시에 요구된다. 특히 오늘날에는 균과 분자와 귀신과 같이 숨겨진 생명, 보이지 않는 생명, ’생명 아닌 생명‘이 중요하다.
요컨대 만물활계, 만민활계의 관건은 ’활명(活命)‘이다. 소화제 ’활명수‘의 그 ’활명‘이다.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신명 혹은 영성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리고, 그 비결은 신약성서의 ’오병이어‘의 기적이 그렇듯이, 시천주(侍天主) 인간의 호혜적이고 차원변화 하는 회로를 통해 구현된다. 스스로, 그리고 서로 살린다. 만물이 만물을 살리고, 만민이 만민을 살린다. 만국이 만국을 살린다. ’자기회귀‘의 신묘한 고리가 그것이다.
네트워크와 회로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형식/매체‘가 있어야 한다. 효모 향 그윽한 막걸리가, 오묘한 테크노 음악의 선율이, 영험한 부적(符籍)과 같은 지각 매체들이 오감과 신체를 깨우고 영혼마저 살려낼 것이다. 시적 언어와 상징적 이미지, 명징한 몸짓 의례와 같은 사회적 소통매체들이 정동(情動), 즉 생명의 활력을 촉진하고 격발할 것이다. 물론 박애와 평화와 같은 ’가치매체‘도 물론 여전히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생/사‘와 ’상생/상극‘의 역설적 문법, 생명과 사회의 분열과 연동의 메커니즘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 병행되어야 한다. 요컨대, ’흥/비(興/比)의 역동적 균형이 요구되는 것이다. 흥(신명)으로 기우뚱하지만, 비(논리)가 뒷받침되는.
전북을 ‘네오휴머니즘’ 개벽인간의 성지로
놀랍다. 최근 나는 경향 각지에서 ’개벽을 꿈꾸는 혁명가들‘와 ’혁명하는 신선들‘의 출몰을 목격한다. 그들은 생명·개벽사상과 풍류미학을 공부하고 실험하고, 무엇보다 즐길 줄 안다. 개벽의 코드를 음악과 그림으로 작곡하고 디자인한다. 그들은 콕 집어서 백제문화와 전라도를 새로운 사상과 문화의 원류로 지목하기도 한다.
그런데, ’활계‘의 비결 중의 비결은 역시 도사와 신선, 혁명가와 개벽인을 기르는 일일 것이다. 포스트휴먼과 트랜스휴먼은 새로운 인간의 도래를 암시한다. 그것은 ’인간 중심주의 이후의 인간‘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비인간, 생명/비생명이 역설적으로 연동하는 새로운 세계관과 삶의 형식과 스타일을 체현한 ’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유목적‘이고도 ’정착적‘이며, ’지역적‘이면서 동시에 ’지구적‘인, 나아가 우주적인 새로운 인간형이 그것이다.
최근 신유물론은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해체하려 하지만, 그것이 도달점을 아닐 것이다. 해체의 경유해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네오휴머니즘‘이나 ’신인간주의‘이라고 말해도 좋다. 김지하는 ’우주적 휴머니즘‘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일제강점기 전북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김제 모악산과 금산사 일대에 후천개벽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나라를 잃고 몸과 마음을 의지할 데를 찾지 못한 민중들은 ‘시국(時國)’이라는 이름의 새 나라를 세우고 정읍 입암을 도읍지로 정한 보천교를 따라 정읍으로 정읍으로 몰려들었다. 전북과 정읍은 세계 끝 일제강점기 새로운 세계의 성지가 된 것이다.
전북이 네오휴머니즘의 성지가 되기를 열망한다. 100여년이 지난 21세기의 오늘, 방콕과 은둔의 청년들과 우울감과 불안감의 장년들이 머물고, 스스로 치유하고, 거듭날 수 있는 ‘신인간’의 성지가 되기를 기대한다. 탈-의미의 시대, 허무주의는 정신승리로 극복될 수 없다. 수많은 새로운 세계들이 창발되는 ‘창조의 수도(首都)’가 되기를 소망한다.
전북은 개벽인간의 중심이 될 것이다. ‘친구’ 전략의 정점에 신인간, ‘신인류 되기’가 있다. 개벽세상은 신인간의 탄생을 동반한다. 포스트휴먼 시대, 인간학은 다시 핵심 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개벽대학 원광대와 함께, 글로벌대학 전북대와 함께, 금산사와 실상사와 같은 사찰들, 그리고 전북에 산재한 동학혁명 유적지들과 함께, 그리고 새만금 바다와 함께, 서양의 위버멘쉬와 동양의 개벽인간이 만나는 동서통합적 신문명의 성지가 되기를 염원한다.
호남고속도로 정읍 톨게이트를 나오면, ”‘혁명의 도시’ 정읍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전주 톨게이트를 나오며, “’만국활계의 도시‘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혹은 “’활생-활명의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초대형 현판을 볼 날을 그려본다.
2024년 2월 정해마을, 활생·활명 생명운동의 새로운 시작
개발의 전북특별자치도와 다른 또 하나의 전북특별자치도의 시간이 2024년 2월 시작된다. 장소는 ‘우주의 배꼽’, 정읍이다. 정읍의 시원이라는 백제시대 정촌현(井村縣)의 그 ‘정해(井海)마을’이다. 정읍 사람들은 ‘샘바다’라고 풀어 말한다.
눈앞에서 보름달과 음개벽(陰開闢), 정자(井字) 우물과 ‘우주의 배꼽’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샘’이면서 ‘바다’인 ‘샘바다’의 흐름과 물결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2024년 탄신 200주년을 맞은 수운 최제우의 고향 경주 ‘용담의 물’이 사해로 흘러가듯, 정읍 정해마을의 우물이 한류의 그것을 따라 온 세계로 흐를지도 모를 일이다.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 ‘샘’이 곧 ‘바다’다.
올해 2024년은 ‘생명가치가 샘솟는 지역’을 꿈꾸었던 <생명민회>가 창립된지 30년이 되는 해이고,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를 모토로 생명문화운동을 포부를 실현코자 했던 <생명과 평화의 길>이 창립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들 단체는 진즉 문을 닫았고, 이들 단체의 창립을 주도했던 김지하는 이미 세상을 떴다. 그러나 생명은 ‘생/명’이다. 생명은 나고 죽음의 불연속적 연속을 통해 ‘네버엔딩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것은 밈(meme)이 되어 전파되고 전염된다. 우리의 무기는 인스타그램이다. 페이스북이다. 트위터다. 그리고, <작은새책방>과 같은 지역의 독립서점들과 정읍의 <동학시정감시단>과 같은 독립단체들이다. 흰 소나무와 같은, 그 아래 송이 버섯 같은 지역의 언니들과 어르신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무기는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의 ‘감응(感應)에 대한 믿음’이다.
갑진년 ‘청룡의 해’ 생명운동이 다시 시작된다. 그 이름은 ‘활생·활명 운동’이다./주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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