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신국가 건설운동(지은이 안후상, 펴낸 곳 민속원)'은 민중의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는 객관적 사례를 제시한 연구서다. 이 책은 한국 신종교의 민족운동을 33년간 연구해 온 안후상 박사의 학위논문 '일제강점기 보천교(普天敎)의 민족운동 연구(전남대 사학과)'이다. 이 책의은 첫째,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활동이 민족운동이며, 둘째, 일제강점기 민중들의 민족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셋째, 지식인들의 민족운동과는 달리 민중의 민족운동은 지극히 토속적이며 전통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실증적 사례 제시다.
19세기 조선은 정치·사회적 문란과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었고 민중(民衆)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피폐하였다. 여기에다 서양 제국주의 세력 및 일본의 침략적 접근이 거세었다. 이러한 가운데 지배 이념인 성리학(性理學)과는 다른 주장을 담은 새로운 종교가 등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게 동학(東學)이다. 보천교는 전라도에서 동학운동(東學運動)을 주도하던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이 강증산(姜甑山)을 만나면서 시작됐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차경석의 부친은 정읍의 동학 접주이자 장령 차치구(車致九)이다. 농민전쟁 이후의 차경석은 세칭 ‘영학당의 봉기’(1889)에 참여했으며, 동학의 두령으로서 전라도에서 민회 활동을 주도했다. 1905년 손병희(孫秉熙, 1861~1922)와 갈라선 차경석은 1907년에 강증산(姜甑山. 1871~1909)을 만났다. 당시 강증산의 모든 제자가 동학농민군 출신이었듯이 차경석도 동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차경석이 강증산을 만나면서 ‘증산도문(甑山道門)’이 형성되었고, 그 도문(道門)을 세인들은 ‘태을교(太乙敎)’ 또는 ‘선도교(仙道敎)’라고 불렀다. ‘보천교’는 1922년에 표명된 교명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은 동학농민운동의 변현(變現)이라고 볼 수 있다.
보천교는 일제강점기 내내 24 방주(方主) 또는 60 방주(方主)라는 거대 민중 조직을 통해 새로운 정부나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려는 ‘후천선경(後天仙境) 신정부(新政府) 건설운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이러한 보천교의 활동을 “국체(國體)를 부정하는 불온(不穩)한 사상”으로, 그리고 “독립운동”으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1918년 제주도에서 강증산 계열 종교인으로 보이는 김연일(金蓮日)과 보천교인 박주석(朴周錫)이 제주의 민중을 이끌고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하였다. 일제를 몰아내고 제주의 왕(王)이 되겠다는 이들은 충청남도 계룡산(鷄龍山)에다 도읍(都邑)을 정하고 황제(皇帝)를 옹립시키겠다며 제주의 민중을 끌어들였다.
1921년 보천교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을 전개하였고, 급기야 경상남도 함양의 황석산에서 국호를 ‘시국(時局)’이라 선포하는 고천제를 지냈다. 하지만, 일제는 보천교를 사교(邪敎)로, 미신(迷信)으로, 무지몽매(無知蒙昧)로 몰아갔다. 그리고 보안법, 치안유지법, 육군형법 등으로 탄압했다.
1920년대 보천교는 국내외 민족운동을 인적·물적으로 지원했다.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한 보천교는 1930년대까지 자작자급(自作自給)의 경제 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 '산업계/가 보천교 보광사(普光社)의 도움으로 발간되었는가 하면, 민립대학설립운동에도 보천교 간부들이 참여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는 만주(滿洲)의 민족운동 단체 정의부(正義府)와 함께 군자금 모집을 시도하기도 했다.
1923년 보천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5만 원을, 김좌진 계열에 2만 엔을 건넸다. 의열단이나 불변단 등 독립운동 단체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신채호의 부인 박자혜, 3·1 운동의 실무를 맡은 임규, 불변단의 조만식(趙晩植) 등은 한때 보천교 간부를 지냈다. 그러나 보천교의 민족운동은 고천제(告天祭)를 통해 ‘시국(時國)’이라는 국호를 선포하고 새로운 정부나 국가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보천교가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일본의 왕(王)을 부정하고 식민지 상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1929년 일제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전라북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 건설된 보천교 중앙본소를 대대적으로 압수, 수색하였다. 이때 “일대일료(一大一了)”가 새긴 ‘천자검(天子劍)’이 발견되었다. 일대일료(一大一了)를 조합하면 ‘천자(天子)’가 되는 셈이다. 옥새(玉璽)도 발견했다.
일제는 ‘천자검 사건’을 계기로 보천교의 해산을 종용하였고, 급기야 1930년대에는 보천교의 활동을 금지하였다. 이때 보천교에서 이탈한 ‘보천교계 신종교’들은 뿔뿔이 흩어져 ‘후천선경 신국가 건설운동’을 비밀리에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는 한반도에서 그 어떤 민족운동도 불가능한 시기였다. 이때 보천교계 신종교들은 끊임없이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고 기원하였다. 일제는 이들을 “민족주의가 농후하고 국체를 부정한 불온한 비밀결사 단체”라며 보안법이나 치안유지법 등을 적용해 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이 사망하였으며, 체포된 이들만 천여 명에 달했다.
일제강점기 민중은 나라를 되찾을 마땅한 정치적 책략이나 경제적 수단이 없었다. 단지 '정감록(鄭鑑錄)'이나 각종 비기(&;記), 그리고 강증산의 예언에 기반해 진인(眞人)의 출현을 고대하였다. 그리고 고천제(告天祭)나 예언 등을 통해서 양반 중심이 아닌 민중 중심의 새로운 이상 국가의 건설을 시도하였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신국가 건설운동’이다.
일제강점기 보천교는 후천선경을 상징하는 성전(聖殿)인 십일전(十一殿)과 거대한 중앙본소를 건설했다. 그리고 ‘정전제(井田制)’라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신도시를 건설했다. 몰려든 교인들은 성속(聖俗)을 넘나들며 경제적인 공동체를 꾸려나갔다. ‘왜산 물산 안 쓰기 운동’을 벌이면서 직물공장, 염색공장, 갓공장, 농기구공장 등을 설립해 운영하였다. 한편, 보천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함께 한국(韓國)을 독립시킬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이와 같은 보천교의 활동에는 항일과 함께 민족성이 들어있지만, 당시 지식인들은 보천교의 이러한 성향을 보지 못했다.
보천교가 해산된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에도 보천교계 신종교들의 ‘후천선경 신국가 건설운동’이 이어졌다.‘신정부’를 ‘신국가’로 바꾼 까닭은 강화된 민족성의 표출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강원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선도교(仙道敎)는 ‘후천선경 신국가(新國家) 건설’을 선언하며 민중을 끌어모았다. 이들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주송수련과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고 기원하는 행사를 벌였다. 전라북도의 황극교(皇極敎)와 미륵불교의 ‘신인동맹(神人同盟)’은 고천제와 수령제(受靈祭) 등을 통해서 민중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특히 ‘신인동맹’은 비밀리에 일본 메이지〔明治〕 천왕의 혼(魂)을 불러내 ‘혼쭐’을 냈다. 그리고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는 무속에 가까운 행위들을 이어 나갔다.
경기도 수원의 인도교(人道敎) 역시 “개 같은 왜적놈들아 …”라는 동학의 가사를 인용하여 교인들에게 반일 의식을 주입하였다. 전라북도 부안의 원군교(元君敎) 역시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는 기원제를 올렸다. 이처럼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고 기원하는 토속적 행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받다 사망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판결문’에 올라와 있는 보천교 관련 독립운동 관련자들은 400여 명에 달하며, 그 가운데 150여 명이 독립유공자이다. 안후상의 앞의 책은 이러한 통계 및 통계를 입증하는 내용들로 구성돼 있다. 일제강점기 민중은 ‘타자(他者)’인 일제(日帝)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그 방법은 지극히 전통적이고 토속적이다. 그렇지만 당시 지식인들은 보천교의 이러한 민족성을 외면했다. 그리고 근대성(近代性)을 선(善)으로 보천교의 전(前)근대성을 악(惡)으로 치부하면서 민중의 민족성은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됐다. 그리고 근래 일부 연구자들은 근대성이 없는 보천교의 행위를 민족운동으로 바라보지 않았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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