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현충일이다.
충의지사, 열혈의인이 넘치게 많았음은 한국 근대사의 자랑이자 아픔이다. 수많은 그 분들이 익명으로 스러져 뒷 사람 가슴을 한층 저민다. 전주시 서학동 초록바위에 자리잡은 동학농민혁명 녹두관에도 그런 분이 있다. 몸은 없고 머리뼈만 남은 이, 바로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이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일본군에 체포돼 전남 진도에서 참수됐다. 신체와 분리된 그의 두골이 진도 밖으로 유출돼 오랫 동안 잠자다 1995년 일본 북해도의 한 대학 표본창고에서 발견됐다. 뼈에 구멍을 뚫는 등 저들은 두골을 비인도적인 인종학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뼈엔 ‘동학군 수괴(首魁)’라는 쪽지만 붙어있을 뿐 신원 확인이 어려웠다. 김개남, 손화중 등 저명한 동학 장군 후손의 DNA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이 ‘무명’ 지도자는 지난 2019년 6월 현 위치에 안장됐다.
지난 주말 전남 무안에서도 동학군 지도자의 유골이 발견됐다. 역시 머리뼈 뿐이지만 이번엔 다행히 신원이 확인됐다. 128년 전 희생된 김응문·효문·자문 3형제와 김응문의 아들인 김여정 등 4인이다. 나주 김씨 장자인 김응문은 무안 몽탄 일대 동학 접주로 활동하며 농민군을 모아 1894년 백산전투, 황룡강전투 등에 참가했다. 김응문 접주는 전봉준 장군의 주력부대가 공주 우금치에서 패한 뒤에도 물러서지 않고 그해 11월 나주성 공격을 위한 고막포 전투를 벌였으나 패해 12월9일 일본군에 붙잡혔다. 사흘 후 두 동생과 아들도 체포돼 함께 효수됐다. 김응문 집안은 백방 노력 끝에 희생자들의 머리만 간신히 수습, 항아리에 넣고 몰래 앞산에 묻어 보존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동학혁명군들의 시신은 모조리 불태워져 이름과 자취를 알 길 없다. 그나마 참수를 당한 지도자 급만 극히 일부 머리뼈나마 남겼을 뿐이다. 동학농민혁명 참가 농민군은 최대 100만 명이다. 개중 최대 10만 명이 희생됐다. 일본군 사망자는 최대 200명 정도다. 사망자 비가 500 명 대 1 명이다. 그야말로 일제 기관총에 의한 학살이었다. 16세기초 불과 160 명으로 페루 전국을 도륙한 스페인 학살자 피사로의 만행이 그만 했을까.
어제 현충일, 조기를 달았다.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처럼 고국에 안장된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거니와 수많은 충혼들이 또 얼마나 많이 떠돌고 계신가. 심지어 안중근 의사의 유골조차 찾지 못한 우리다. 어제 오전 10시 묵념 사이렌이 전국에서 울렸다. 그 사소한 1분으로 선열께 작은 흠향이 되었을지. /임용진(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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