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종상(자연삶연구소장)
올해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 장군의 순국 기일은 4월 30일이다. 전봉준 장군이 4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지 어느덧 12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1894년 1월 10일(음력) 고부기포를 시작으로 무장기포, 백산결진, 황토현전투, 장성 황룡촌 전투, 전주성 점령, 전주화약, 삼례기포, 공주 우금치전투, 대둔산전투 등을 이끌었다.
그가 1894년 12월 2일(음력) 순창 피로리에서 체포된 뒤 일본영사관 감방에 이감되어 1895년 3월 30일(음력) 내란죄로 교수형이 집행되기까지 법리아문 재판관에게 다섯 차례 심문을 받았다. 온갖 고문으로 발걸음조차 띠기 어려운 몸으로 심문을 받으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선비로서 훈장일을 하던 그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 광제창생(廣濟蒼生),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새삼 뒤돌아보게 한다.
고부기포의 단초가 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백성을 수탈한 참상의 기록은 ‘전봉준 공초’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부임 초부터 학정을 하였고 만석보(동진강과 정읍천의 합류지점)에 새로운 보를 쌓고 경작 농민에게 1마지기(661㎡)당 상등 논은 2말, 하등 논은 1말의 세금을 강제로 정하여 총 700여 석을 거두고, 황무지를 백성에게 세금 없이 개간 경작하도록 권리 증명서를 해주더니 추수할 때는 강제로 세금을 징수했다. 부자인 백성에게는 불효·불목·음행·잡기 등 죄목을 붙여 강제로 2만 냥을 빼앗았다.
태인현감을 지냈던 친부의 비각을 세우겠다며, 강제로 거둔 돈이 1천 냥이다. 대동미를 민간에게 흰쌀값으로 거두고 조정에는 잘 찧지 않은 쌀을 섞어서 보내고 차액을 착복했다. 그 외에도 허다한 내용은 이루 다 적을 수 없고, 이러한 일들이 수십 곳에서 행해졌다. 만석보 신보를 쌓을 때는 타인의 산에서 수 백년된 거목을 강제로 베어내고 보 쌓는 노역자에게 노임을 한푼도 안주고 강제노역을 시켰다. 전라도 감사 아래로 각 고을의 지방관은 열에 여덟아홉이 탐관이며, 내직에 있는 이가 매관육작(賣官&;爵)으로 일삼으니 내외는 물론 다 탐학이다고 실상을 밝혔다.
조선 말기 지방관의 탐학과 수탈은 최고조에 이르고, 일본군의 영향력은 조정의 문턱을 넘어섰으며, 군권은 무력화되어 치안유지가 어려웠다. 전제군주제 국가인 조선은 이미 국운이 다해 패망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의 민본정신은 전주화약(휴전화약)의 폐정개혁 12조에 담겨있다.
△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 7종의 천인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쓴 평량갓은 없앤다. △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 관리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한다. △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이러한 획기적인 국정개혁안을 관철시킨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의 각지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제2차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폐정개혁을 시행했다. 잠시나마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지방자치제가 시행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민주주의가 시행되고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으나 공적 영역에서는 특혜논란과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의 공적 의식 수준에 불만을 나타내는 시민이 다수이다. 시민사회의 부정부패 척결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지역 특성이 없는 케이블카, 출렁다리, 짚라인 등 관광레포츠시설의 무분별한 도입은 개발사업의 공적 신뢰도를 실추시키고 시민의 혈세를 축내는 일이다.
AI 검색 알고리즘에서 학연·혈연·지연·온정주의에 의한 인사청탁, 부정채용, 매관매직 등 인사비리, 측근비리, 친인척비리, 부패카르텔, 사건무마청탁, 인·허가청탁, 사업수주청탁, 일감몰아주기, 직위를 이용한 가스라이팅, 맹목적인 충성 강요, 뇌물, 부정부패, 성범죄 등이 상위 검색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1983년 8월 4일 일본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의 ‘고노 담화’ 이후 반성이 없는 일본 정부에게는 일제의 조선인학살과 인권유린, 국토침탈의 죄상과 역사왜곡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1970년 12월 7일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 출신인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했다. 그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아래 계단에서 비를 맞으며 공손히 무릎을 꿇고 나치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의 용기와 진심 어린 행동에 폴란드 국민과 세계인은 감동했다. 독일은 나치의 과거사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행동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
전쟁범죄와 학살범죄의 책임은 국가 간에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자국민에 대한 학살범죄는 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제주4·3사건 희생자에 대한 사죄와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가담자는 군사 정변의 불행한 역사를 다시 쓰지 않게 발포명령자를 밝혀야 한다.
해마다 열리는 동학농민혁명기념일 행사에 참가하는 공직자는 과거사를 기념사나 추념사로 포장할 게 아니라 희생자의 영령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다시금 탐관오리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약속을 되뇌이고 실천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장군 등의 지도력과 이름 모를 용사들의 용기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비록 아쉬움이 많은 미완의 혁명이 되었지만 그들의 혁명정신이 국민의 가슴속에 오롯이 새겨져 시민의 손으로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여 미완의 혁명을 완수하기 바라며, 이 글을 임인년 전봉준 장군의 제단에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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