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혜(심상 시치료 센터장·전주대 겸임교수)
눈과 손을 끄는 것은 다분히 감각적이다. 네이버 콘텐츠제휴 73개의 언론사에 대한 2021년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이 읽힌 뉴스는 저질이었고 연성화된 뉴스였다. 기자협회보에 따르면 이를 ‘페이지뷰(PV)’에만 혈안이 된 ‘PV 지상주의’라고 밝혔다. 100만 뷰가 넘은 기사들이 많았지만, 사회적 중요한 이슈가 있는 기사는 드물다는 것이다.
‘지상주의’ 앞에 명사가 붙어 표방되는 뜻들은 대부분 끔찍하다. 오직 한 방향만 바라보게 한다. 외모 지상주의, 물질 지상주의, 행복 지상주의, 결과 지상주의, 실력 지상주의, 학력 지상주의, 종교 지상주의 등등이다. 그것에만 몰리는 이유는 ‘최고’라는 인식 때문이다. 입맛에 맞게 설정한 최고의 기준으로 값을 매긴다. 그 과녁에서 빗나가면 눈 밖으로 벗어난다. 가치 판단에 따라 뚜렷한 경계를 짓게 된다. 경계선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가차 없다. 그런 까닭에 목숨을 걸게 된다. 자신이 정한 가치에 목매다는 꼴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도 그러하다. 이미 우리 사회는 온갖 지상주의의 밭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야 최고가 된다는 아우성이 곳곳에 즐비하다. 최고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이 파멸로 몰아간다. 현대인들의 자존감은 점점 떨어지고 불안은 올라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래 ‘지상주의’는 러시아 화가 말레비치가 창시한 선구적 추상회화의 이념이다. ‘절대주의’라고도 부른다. 1913년 말에 그는 흰 바탕에 검은 정사각형을 두 개의 연필로 칠한 그림을 전시했다. 비대상적, 비재현적인 감각과 지각을 회화예술의 궁극적 지점으로 삼았다. 그의 절대주의는 플라톤식으로 말하자면, ‘이데아’의 추종이다.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초월적 실재가 바로 ‘이데아’다. 이는 감각 세계의 너머에 있는 실재이자 모든 사물의 원형이다. 이데아의 속성은 ‘진리’다. 하이데거는 현상계에서 진리가 일어나는 다섯 가지 본질적 방식을 예술작품, 사회적 행위, 존재에의 가까움, 희생, 사유라고 한 바 있다. 그러니 지상주의의 뿌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물질과 감각에 그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오독이다. 본뜻이 비틀어진 채 굳어져 버렸다. 원래 지상주의의 행위를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맨머리로 서서 신의 빛살을 제 손으로 붙들어 노래로 감싸주는 시인’이다.
지상주의의 참뜻으로 보자면, 경계는 허물어진다. 삶은 성숙을 위한 현상의 장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뿌리를 두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노력은 경건하고 과정은 성스럽다. 옷깃을 여미며 정진하게 한다. 흔히 쓰는 지상주의로 보자면, 그것은 크고 넓은 문이다. 좁은 문에다가는 손가락질하기도 한다. 우르르 몰려가기도 쉽다. 그러다가 고꾸라지고 다치기 일쑤다. 좁은 문은 가난하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유한하나, 하늘은 무한하다. 이 원리대로라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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