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실존의 관계를 젊은 감각으로 풀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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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지은이 지영, 출판 광화문글방)'은 언어와 실존의 관계를 젊은 감각으로 풀어낸다. 즉, 플라톤이 제시한 개념 '시뮬라크르'(simulacre)는 쉽게 말하면 본질(이데아)을 복제한 가짜, 즉 허상을 뜻한다. 근대 철학 이후 시뮬라크르의 개념은 질 들뢰즈에 의해 더 구체화하는데, 그는 모든 이미지가 실체인 원본의 복제품이라고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문학 비평이 해석하는 시뮬라크르는 아예 복제를 다시 복사한 복제를 뜻하게 됐다. 즉 '원본이 실종된 복제'인 셈이다. 예컨대 당신을 찍은 사진을 보고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나'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나'가 아니다. 나의 실체가 아닌 나를 그려놓은 허상의 이미지일 뿐이다. 게다가 이런 '나'의 사진 이미지는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 이런 시뮬라크르의 개념이 극대화한 공간이 바로 가상현실(VR)이고, 이 VR을 현실에서 상업적으로 구현하면 요즘 주목받는 '메타버스'(Metaverse)가 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만 구사할 줄 알던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한국어를 완전히 잊고 잃는 대신 '낫 놓고 기역 자도 몰랐던' 프랑스어를 완벽히 쓰게 됐다면, 당신은 과연 당신이 맞는가? 당신의 언어적 정체성이 바뀌었다면 당신의 본질은 사라지고 허상만 남은 게 아닐까? 그런데 또 다른 고민도 있다. 지금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내가 볼 때 한국어를 말했던 과거의 나는 나의 인생에서 진짜 본질이 맞았을까?

올해 수림문학상 수상작인 지영의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이런 실존적 화두를 새롭고 신선한 형식으로 담아낸 장편소설이다. 미국 시애틀의 한 쇼핑몰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현장에서 파키스탄 이민자 소년을 구하려다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인도계 미국인 수키 라임즈에게 일어난 기이한 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세계인에 감동을 주고 영웅이 된 수키는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한 지 오십 여일 만에 깨어나 첫 마디를 던진다. 'Mori…Upper'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던 이 말은 같은 병원에 입원 중이던 한국인 한준의가 수키를 만나면서 마침내 의미가 통한다. 그가 처음 뱉어낸 말은 한국어로 '머리 아파'였다. 수키는 영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한국어만을 구사할 수 있게 됐다. 그것도 원어민에 전혀 뒤지지 않는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이 전대미문의 이상 증상은 의과학계의 관심을 받으며 '수키 증후군'이라는 새로운 질병명까지 탄생시킨다. 극한의 분쟁과 갈등 상황 또는 사고 현장에서 크게 다쳤으나 목숨을 건진 사람들에게서 발현된다는 공통점도 발견됐다. 이 병은 최초 발병자 수키에 국한하지 않고 서서히 퍼져나가 2023년 기준 5,213명까지 환자가 늘어난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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