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연(서예가·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초빙교수)
전북에는 추사 친필 비문들이 몇 건 남아 있어서 중요한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이들 중에 고창군 선운사 부도탑내에 있는 '백파율사비(白坡律師碑, 전북 유형문화재 제122호)‘는 한국 불교학, 금석학, 서예학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이다. 비문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직접 백파율사에 대해 글을 짓고 앞면은 해서로, 뒷면 음기는 행서로 썼다. 비문 음기의 관지를 보면 “숭정기원후사무오오월 일립(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 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추사 생전인 1855년에 글을 받아 그의 사후 2년뒤인 1858년(철종 9)에 건립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비는 오랜 세월 선운사 입구 부도탑내에 세워져 있었으나 자연풍화로 인한 비문의 마모와 문자 탈락 현상이 생겨 2006년 문화재원형보존 차원에서 원비는 선운사 성보박물관내로 옮겨졌고, 5%정도 축소한 복제비가 원래의 자리에 세워져 있다.
고창 선운사에 백파율사에 대한 비가 세워지게 된 배경에는 추사와 백파율사와의 평소 교유와 사상적 논쟁을 벌였던 오랜 인연이 있었고, 정읍 내장사에서 수행하고 있던 설두(雪竇)와 백암(白&;) 스님이 추사가 말년에 머물던 과천의 추사초당을 찾아가서 3년전 돌아가신 백파스님의 비문을 짓고 써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면서 이루어졌다. 이에 추사는 비문을 짓고 비의 앞면에는 크게 해서로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비명을 적고, 뒷면에는 행서로 백파율사의 화엄종을 꽃피우게 된 경지를 써서 추사 의 명문장과 노년의 해서와 행서를 볼 수 있는 명품이 남겨졌다. 특히 비문의 전액을 전서로 쓰는 일반적인 양식하고는 다르게 비문의 제목을 해서로 쓴 또 다른 표현 양식을 보게 된 것이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이미 백파율사와 추사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논변을 격하게 하였던 바도 있었지만 백파스님만이 일종(一宗)을 이루었다고 쓰고 대기대용비라고 쓰면서 그 경지를 인정하였고, 비문의 문장을 통해 추사의 불교학에 대한 깊은 경지의 표현 또한 있게 되었다.
백파율사는 조선 후기의 승려 긍선(亘璇, 1767~1852)의 법호이다. 화엄종 계통의 승려로, 숭유배불정책을 무릅쓰고 당시의 불교 진흥에 헌신하여 불교계를 다시 꽃피우게 한 화엄종의 종주이다. 비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의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이에 해당할 만하며,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팔십 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기 때문에 비문의 제목을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하였다”고 하며 “지금 백파의 비석에 새길 글자를 지음에 만약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한 구절을 큰 글씨로 특별히 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碑)로서 부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써서 설두(薛竇)와 백암(白&;) 여러 문도(門徒)에게 보인다.” 라고도 하였다.
또한 추사는 “가난하기가 송곳 꽂을 자리도 없지만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하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니 그 가풍은 정말로 진실하다. 속세의 이름은 긍선이지만 그 나머지는 말해 무엇하리오” 라고 하여 백파의 업적과 더불어 인품을 칭송하였다.
추사가 이 비문을 짓고 쓴 시기는 9년 동안의 제주도 귀양살이와 또 북청에서의 4년 유배를 거쳐 지친 상태에서 부친 김노경이 세웠던 과천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머물며 생애 마지막 4년 동안의 기간을 학문과 예술에 전념했던 때이다. 이 시기인 1855년에 선운사 백파율사비를 썼고, 임실 효충서원의 '조선효자증교관김공기종정려비'와 '조선효자증참판김공복규정려비' 등을 써서 전북에도 그의 필적을 남겼고 1년 뒤에 열반하셨다.
이 비문과 관련한 추사 행서 묵서작품 <백벽(百蘗)>에서도 발문에 “백문종취 거양대기대용 이차이字 서부설두상인(白門宗趣 擧揚大機大用 以此二字 書付雪竇上人)” 라고 써서 제자들이 대기대용설(大機大用說)을 거양한 백장(百丈)고승과 황벽(黃蘗)고승을 본받으라고 쓰고 자신의 별호인 ‘승련(勝蓮)’이라고 썼다.
이렇게 우리나라 최고 서화가이며, 고증학·금석학·불교학·경학의 대가인 추사가 조선 후기 화엄종의 종주로 인정한 벽파율사의 비문을 말년에 짓고 쓴 문화재가 보물이 많은 고창 선운사에 남아 있음은 우리 전북의 자랑이며, 자긍심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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