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5 광복절은 누구나 태극기 하나 걸고서 순국선열과 애국정신을 떠오르며 하루를 보낸다.
고창군 역시 대로변에 자랑스런 고창 독립운동가 96인의 베너 현수막을 내걸고 동리국악당에서 제76주년 광복절 경축식과 함께 성송면에 있는 정시해(의병활동) 충효비와 대산면의 김영수(국내 항일) 공적비를 방문했다. 때문에 의향고창, 의병고창으로서 손색없는 지역이다.
고창 독립운동가 96인 가운데 고수면 은사리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의병의 혁혁한 공을 세운 김공삼, 박도경 의병장을 되짚어 본다./편집자주
◇ 은사리 출신 김공삼 의병장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의병장 김공삼(김봉규) 기적비는 아산면 주진리에 위치한 ‘고창군 공설묘지’ 상단부에 500여 유공자와 함께 순꾸의 얼을 지키고 있다.
김재관 아산면장은 “광복절 연휴 군민과 묘지 이용객들에게 쾌적한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300여평의 부지를 벌초했다”며 “이곳에 안장된 의병장 김공삼은 지역의 자랑스런 호국정신이다”라고 말했다.
의병장 김공삼은 1866년 고수면 은사 태생으로 1907년 의병장 기삼연의 휘하에서 중군장으로 있으면서 고창, 무장, 부안과 전남 담양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1908년 기삼연이 피체된 후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며 박도경을 포사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부하 200여명을 지휘하며 부안군의 접경인 변산에서 일군기병과 교전 등으로 공을 세웠으나 1909년 9월 20일 일경에 붙잡혀 광주지방법원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언도 받았다.
마침내 1910년 1월 대구 공소원에서 쓸쓸히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하였다.
순국 후 고창으로 반장하여 유지들의 도움으로 고수 은사리에 매장되었으나 후손이 없어 묘지가 훼손되자 1994년 고창군의회가 주관해 아산면 공설묘지로 이장하여 공을 기리고자 기적비를 세웠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당시 호남지역 대표적인 의병인 면암 최익현 의진과 정미의병중 호남창의회맹소라는 연합 의병지휘부를 결성해 활약한 기삼연(장성 출신) 휘하 의진에 고창지역 독립운동가가 다수 활동한 것.
◇ 은사리 출신 박도경 의병장
현충시설 한말의사 박도경 추모비는 고창읍 새마을공원에 자리잡고 있다.
박도경(박경래)은 1874년 고수면 은사리에서 출생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창 문수사에 주둔하고 있던 호남창의대장 기삼연 포사장과 함께 문수사에서 일본군과 대접전을 벌리고 고창읍을 습격해 일본 경찰로부터 무기를 탈취하는 과정에서 관련 정보를 수집, 제공하여 작전 성공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08년 기삼연이 체포되자 격문을 돌려 김공삼과 함께 의병활동을 독려하고 포사장이 되어 의진을 지휘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극심한 토벌작전으로 의병활동이 어렵게 되자 장성 등지로 피신, 의병 모집과 군사훈련, 군자금 모금활동 등에 주력했다.
1909년에는 전수용(임실) 의진과 연합하여 남포, 부안 등지에서 활약 및 부안군 상서면에서 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 기병대와 교전하다가 패하자 의병을 해산하고 은사리 가협산으로 피신하였으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수많은 고초를 치렀으며 광주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나 왜놈의 손에 죽는 것 보다는 자결하는 것이 옳다고 결심해 대구 감옥에서 자결해 순국하였다.
박도경의 사후 대구의 아전들이 돈을 추렴해 초상을 치렀는데 이때 대구의 약령시에 모인 상인들이 수백 냥을 모아 고향으로 반장할 수 있도록 도왔고 영남의 선비들이 제전을 올려주었다고 한다. 1963년 의사의 묘는 고수면 은사골에서 고창읍 단군성전 옆으로 옮기고 추모비를 세웠는데 2009년 묘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하고 추모비는 의향의 고장 충절의 표상으로 알리고자 고창군의 지원과 유림의 뜻을 모아 새마을공원으로 옮겼으며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제76주년 광복절 경축식, 고창독립유공자 유족회장 정만기씨 기념사
지난 15일 고창읍 동리국악당에서 방역거리두기를 준수하면서 의미 있는 광복절 경축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고창’ 국악예술단의 아리랑을 비롯해 최인규 군의장의 만세 삼창, 모두가 태극기를 휘날리며 광복절 노래를 부리기도 했다.
유기상 군수는 “정의로운 고창군민은 불의를 보면 목숨을 걸고 싸워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이며 항일의병운동, 독립구국운동, 학생 독립운동, 파리장서운동 등 구국독립운동 대열에는 빠짐없이 앞장섰다”며 “김공삼 의사, 백관수 선생, 박도경 의사, 정시해 의사, 박영관 선생 등이 항일 구국항쟁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라고 말했다.
이날 참석자는 윤준병 국회의원을 비롯해 성경찬, 김만기 도의원, 임정호, 김영호, 김미란, 차남준, 진남표, 조민규, 이봉희, 이경신 군의원 및 구정완 육군 제8098부대 2대대장, 김기동 민주평통자문회 군협의회장 등이 참석했다.
아울러 진기영 NH농협 군지부장, 김사중 고창부안축협장, 김영건 산림조합장, 김충 수협조합장, 채창재 전북은행 고창지점장, 이기환 이장단연합회장, 김인석 일광 정시해의사기념사업회장, 류덕근, 김기육, 김갑선, 김민성 농협조합장, 조성욱 베리앤바이오 소장, 실과장과 읍면장 등이 함께 했다.
참석 귀빈으로는 유우영, 고두성, 고영규, 박헌구, 정만기, 정호일, 최낙건 등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귀한 대접을 받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참석자들의 가슴을 울컥하게 한 정만기씨의 기념사이며 리더인 양반에 대한 것이다.
그는 “오늘을 잊지 않고 집에 태극기 게양만도 해도 칭송 받을 만하지요. 이렇게 일신의 이익이 아닌 공동체의 의미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유족이라고 해서 연금이라도 받으니 여기에 왔겠지 하지만 저를 포함한 유족 참석자 90%는 연금대상자 아닌 자랑스런 조상을 기리기 위해 시간들을 내었을 뿐이다는 것이다.
그는 고창의 독립유공자 96분 가운데 대다수가 3.1혁명, 임시정부 등 다양한 분야의 투쟁이었으며 의병부문 참가자는 50%로써 이들 중 딱 한 분만 빼고 다 양반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양반 신분에 대해 정 회장은 “양반이 뭐 길래 특정 신분에서 독립유공자를 대부분 차지하게 되었을까요?”라며 “양반은 여러분처럼 공익을 위한 집단으로 계획 되었으며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은 백성의 5%를 국가리더로 삼아 이들에게는 병역, 세금 등을 면제하는 특혜를 주어서 나라의 인재 못자리를 만든 것이지요”라고 역설했다.
공부를 하는 양반 특혜는 조정에 출사 하거나, 고향에서 후진양성을 하다가도 나라가 난세에 처하면 반드시 의병으로 보답해야 했다는 것. 이들을 양반 중에서도 선비라 불렸다.
의병은 학문연구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목숨도 함께하는 좀 무시무시한 조직이었다.
때문에 일본제국주의는 1909년 의병이 가장 활발한 전라도에서 호남대토벌작전을 벌려 2천여 의병을 색출해 처형과 가족 등 수만 여 명을 학살해 리더 그룹을 완전히 뿌리 뽑았다.
이어 일본은 이듬해인 1910년 8월29에 강제병탄을 공식 선포하는 등 조선침략완수를 선비집단 학살로 마무리 한 것다.
정 회장은 “여기 앉은 21세기 선비그룹에게도 국가라는 공동체는 끊임없이 요구 할 것입니다”며 “공익과 사익 사이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 할지를 말입니다.”라고 경종을 울린 것이다./고창=안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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