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역사 길잡이 조선왕조실록

역사는 자랑스런 부분과 수치스러운 부분을 구분하여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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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한(한국화가, 호산서원 원장)





한 왕조가 5백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그 왕통을 이어갈 수 있고 왕실과 조정에서 일어났단 크고 작은 일들 천재지변으로 인한 재해 풍속 지리 등 후세에 전할 모든 사안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편년체(編年體)의 일기로 기록하여 남겼다는 것은 세계사적인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엄청난 분량 태조로부터 25대 철종까지 472년간 년월일 순서에 따라 1893권 888책(1866卷 887冊참조)이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고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엇다. 실록을 남길수 있었던 것은 역사를 존중하는 우리민족 특유의 선비 정신(역사인식)이 실행되고 있었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규범이 지켜진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첫째: 사관(史官)으로 지명된 30여명의 관원(官員)들이 금력과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는 사실 가령 정승들이나 판서(判書)들이 자신의 비행이 사초(史草)에 적혔다는 사실을 알면 사관들을 찾아가 금력으로 자신의 비위 사실을 지우거나 고쳐 써주기를 간청하고 듣지 않으면 권력으로 협박하였다. 직급이 낮은 사관들이 결단코 이에 응하지 않았음은 자신들이 적은 사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즉 부정과 비리를 적어야 하는 자신들의 소임을 실행한 것이다.

연산군 4년(1498)에 있었던 무오사화(戊午史禍)가 바로 그것이다 광원군(廣原君) 이극돈(李克墩)이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 자신의 허물이 적혀 있음을 알고 그를 탄핵함으로써 빚어진 일대 참사로 수많은 사림(士林)들의 희생이 따랐다. 사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사관들의 역사 인식을 읽을 수가 있다.

둘째: “조선왕조실록”은 “태조강헌대왕실록” “정종실록” “태종공정대왕실록” 등과 같이 각 왕조별로 다시 세분된다. 해당 임금이 죽은 다음에 착수되었던 까닭으로 임금의 비정(秕政:비행)을 낱낱이 적어서 남길 수가 있었다. 임금이 사냥을 가면서 사관은 따라오지 못하게 하였다 임금이 여인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심장에 든 병과 같아서 고치기 어렵습니다와 같은 기록이 가감없이 실록에 등재되기에 임금은 사관을 싫어하였고 사관은 그 싫어하는 임금의 모습까지를 가차없이 기록하는 것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했던 것이다. 임금이 승하하면 새 임금은 춘추관(春秋館)에 명하여 실록편찬을 서두르게 한다. 새롭게 임명된 직급이 높은 사관들은 사초를 엄격히 선별하여 이를 제1초(第1草)로 삼는다. 다시 그것을 정밀하게 검토 선별하여 재초(再草)로 하고 또 그것을 실록청(實錄廳)의 당상(堂上)들이 엄격히 선별하여 삼초(三草)로 삼는다. 이같이 엄격한 과정을 거치면서 채택된 삼초는 사관중에서도 문장과 필치에 능한 사람들에 의해 통일된 문장으로 정리되어 인쇄의 과정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선별 과정에서 채택되지 않은 나머지 사초들은 물에 불려서 먹물을 없앤다 이를 세초(洗草)라고 한다 후에 사초로 인해 분쟁의 여지를 없애기 위함이다 수정할 사초가 마련되면 최고 기관인 의정부에서 점검과 토론을 거쳐 임금의 재가를 얻어 기록을 찢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주서(朱書) 붉은 굴씨로 수정한다.

셋째: 어떠한 경우에도 임금은 왕조실록을 열람할 수가 없다 부왕(父王)에 관한 기록이기 때문에 인지상정상 실록을 열람해 보고 싶어 하지만 이는 절대 권력에 의해 역사가 왜곡되고 훼손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방지하려는 제도적인 장치가 아닐수 없다. 세종임금은 신하들을 불러놓고 부왕의 실록을 열람하게 해줄 것을 간청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실록의 내용을 고치지 않겠다는 확약까지 하였지만 신하들은 이를 용납하질 않았다. 부왕 태종(太宗:이방원)은 아버님 이성계(李成桂:태조)를 도아 조선왕조의 창업을 이끌어 낸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제2인자 였으므로 혁명의 완성을 소망하게 된다. 혁명의 완성을 위한 계책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먼저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한다는 구실로 살아있는 반대 세력들의 재산을 강탈하며 민심의 동요를 줄이기 위해 화려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으로 집권의 시나리오를 삼는다.

넷째: 사초가 끝나면 강원도 오대산 평안도 묘향산 강화의 정족산 등에 사고(史庫)로 보내진다 사고를 산간벽지에 두었던 것은 사람의 왕래가 적어서 화재의 염려가 없고 미증유의 전란에도 남북한 공히 국역본(國譯本)까지 간직하게 된것은 분산된 사고지를 두고 승병들로 하여금 철통같은 경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청소년들에게 바로 인식되어야 하고 꿈을 심어주는 거울이어야 한다. 선각자적인 지도자를 길러내기 위해서라도 우리시대는 진취적인 역사인식을 구축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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