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1년04월16일 14:09 Sing up Log in
IMG-LOGO

[삶의향기] 상촌 신흠의 청백리

“상촌 신흠의 청백리에 옳곧은 철학 이어받고
후세에 오래도록 기리는 마음 간절하다"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1년 04월 07일 12시31분
IMG
/이 존 한(호산서원 원장)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조선중기 문신 서예가이며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4대 문장가로 꼽힌다. 1566년 1월 28일 출생하여 1628년 6월 29일 62세로 사망하였고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으며 송기수와 이재민(李濟民) 문하에서 수학을 했다. 1585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별시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이이(李珥)의 측근으로 배척받아 성균관 권지(權知)에 배정되었다.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 현헌(玄軒) 현옹(玄翁) 방옹(放翁) 여암(旅庵) 경당(敬堂) 남고(南皐) 백졸(百拙)이며 본관은 평산(平山) 벼슬은 동부승지 이조 병조 예조 형조참의 등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 편찬에 참여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고 예문관 제학이 되었으며 성균관 대사성 한성부 판윤 등 역임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여 전주에 피난하였고 9월에 영의정에 올랐다.

신흠은 선조의 두터운 신망을 받으며 문한직(文翰職)을 겸임했고 외교문서와 각종 의례 문서 작성과 시문등에 참여했다. 또한 율법(律法) 산수(算數) 의복(醫卜) 분야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또한 영창대군 신도비 김제남 신도비 등이 대표적이다. 퇴계 이황이 신흠의 시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시 칠언절구 – 동천년노 항장곡(桐千年老 恒藏曲) 오동나무는 천년이 지나도 항상 그 곡조를 간직하고 – 매일생한 불매향(梅一生寒 不賣香)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 월도천휴 여본질(月到千虧 餘本質)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있고 - 유경백별 우신지(柳經百別 又新枝) 버드나무는 백번을 꺽여도 새 가지가 올라 온다. 오동나무는 천년의 세월을 늙어 가면서도 항상 거문고의 가락을 간직하고 매화는 한 평생을 춥게 살아 가더라도 결코 그 향기를 팔아 안락(安樂)을 추구하지 않는다. 달을 구름속에 천번을 이지러지더라도 그 본래의 성질이 결코 변하지 않으며 버드나무는 백번을 꺽이더라도 또 새로운 가지가 올라온다.

원문은 생략하고 산골마을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묻혔구나 사리문을 열지마라 나를 찾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다만 밤중에 한 조각 밝은 달이 내 벗인가 하노라 이 시조는 영창대군과 김계남 등을 제거한 계축화옥(癸丑禍獄)에 연루되어 광해군에 의해 춘천 소양강 상류에 유배 되었을 때의 고독한 심경을 노래한 것이다.

집의 문을 열지 않아도 달이 벗으로 찾아 온다는 한가한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외로운 산길마저 눈속에 파묻혀 버린 산마을 찾아올 사람이 아무도 없이 사립문마저 닫아 버린 산방 겨울의 밤하늘은 유난히도 푸르고 찬데 거기에 외로이 떠 있는 둥근달이야 말로 고요의 극치요 한 폭의 동양화 바로 그것이다 꽃은 꽃이 핀다고 해서 봄이 감사하지 않고 나무는 잎이 진다고 해서 가을을 원망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마음은 외부의 변화에 지극히 열려 있으며 그의 감성은 무엇을 지워내기 보다는 무엇을 받아드리는데 익숙하다.

곧 현재의 상황을 고정된 것으로 보지말고 항상 변화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라고 충고하는 시이다. 거미가 제 아무리 멋진 거미집을 가졌다해도 드넓은 천지를 자신의 집으로 삼는 비둘기의 자유로움을 따라올 수 있을까? 수고롭게 집을 짓고 그 안에 안주하는 거미는 소유하지 않는 것의 기쁨을 알 길이 없다 상촌 신흠은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의 한 사람으로 광해군이 등극하자 파직되어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후 이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유교칠신(遺敎七臣)은 선조가 승하할때 유명(遺命)을 내린 신임하던 일곱사람의 신하 유영경 한응인 박동량 서성 신흠 허성 한준겸 등을 이르며 유명(遺命)한 내용은 자기가 죽은 뒤에 어린 영창대군을 잘 보살피라는 것이다. 그는 장남이 선조의 셋째딸 정숙 옹주와 혼인할 때 주위에서 좁고 누추한 집을 수선할 것을 권했지만 집이 훌륭하지 못해도 예(禮)를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며 끝내 기둥하나도 바꾸지 않을 정도로 청렴했다. 이런 정신과 신념에 목숨 그리고 부정과 불의에 끝까지 저항한 선비 정신이다. 권력과 재물을 추종하지 않고 의를 위해 목숨까지 초개처럼 버리는 정신 어디에 어느자리에 있던 가난하고 억울한 백성을 위하는 여민정신이다. 상촌 신흠의 청백리에 옳곧은 철학을 이어받고 후세에 오래도록 기리는 마음 간절하다.





전북을 바꾸는 힘! 새전북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새전북신문 기자의 최근기사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CAPTCHA Image [ 다른 문자 이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