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도농업기술원 앞 시험포 왕지평야(전북도농업기술원 최선우 박사 사진제공)
부안에는 ‘곰소 둠벙 속 같다’는 속담이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을 보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 마음 속내를 알 수 없거나, 말이 통하지 않아 깝깝할 때 더 많이 쓰이는 말로, 그 유래는 개양할미 설화에서 찾을 수 있다.
전북도농업기술원 최선우박사는 "농촌을 돌다 보면 농경지 한쪽에 크고 작은 물웅덩이를 볼 수 있는데, 전라도 사투리로는 '둠벙'이라고 한다"면서 " 가뭄 때는 소중한 수자원이 되기도 하는데, 최근에는, 멸종위기종 등이 살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로 더 주목받고 있다"고 했다. 더러 물 안에는 토종 논우렁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빗물을 머금고 있는 이 물웅덩이가 유용한 수자원인 셈이다. 전북은 농도다. 이에 둠벙의 전설과 설화를 찾아 길을 떠나본다.[편집자 주]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수성당에 좌정해 있는 칠산바다의 여신. 칠산바다의 주요 해신(海神)은 개양할미와 그가 낳은 여덟 딸들이라 할 수 있다. 개양할미는 칠산바다의 여신을 모두 지휘하는 으뜸 신격에 해당되며 어부들의 뱃길 안전과 풍어를 돕는 기능을 한다. 변산면 격포리의 적벽강 절벽에 있는 수성당은 개양할미와 그의 여덟 딸이 좌정해 있는 당집이다. 변산반도 일대에서는 개양할미에 관한 신화가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되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 개양할미는 수성당 옆의 여울굴에서 나와 딸 여덟 명을 낳은 뒤 일곱 딸은 각 도나 섬에 한 명씩 시집보내고, 자신은 막내딸과 함께 수성당에서 살았다. 수성당은 아홉 여신이 좌정해 있다 하여 구낭사라고 하였다. 그 후 구낭사는 어민들이 개양할미를 바다의 성인 같은 존재로 받들어 모셨다 하여 수성당(水聖堂)이라 하고 개양할미를 수성할미라 부르기도 하였다. 개양할미는 키가 어찌나 큰지 굽나막신을 신고 서해바다를 걸어다니면서 깊은 곳을 메우고 위험한 곳을 표시하여 어부들의 안전을 돌보면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하였다고 한다. 개양할미가 곰소 앞 바다의 ‘게란여’에 이르렀을 때 이곳이 어찌나 깊은지 개양할미의 치맛자락이 약간 물에 젖은 적이 있었다. 이에 화가 난 개양할미가 육지에서 흙과 돌을 치마에 담아 ‘게란여’를 메웠다고 한다. 이곳은 지금도 깊어서 이 지방의 속담에 깊은 곳을 비유하여 말할 때는 “곰소 둠벙 속같이 깊다”고 한다.
신화에 따르면 개양할미는 선원들의 뱃길 안전과 고기잡이를 돕는 칠산바다의 해신임을 알 수 있다. 개양할미는 굽나막신을 신고 서해바다를 걸어 다니면서 위험한 곳을 표시하기도 하고, ‘게란여’와 같이 깊은 물을 흙과 돌로 메우면서 선원들의 안전을 보살피는 기능을 하고 있다.
신화의 내용처럼 개양할미가 낳은 딸들이 전국 각 도에 배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개양할미의 딸들이 칠산어장의 해안·도서 지역으로 시집보내진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변산면 격포리의 죽막동 마을 주민들은 수성당에서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개양할미와 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 오고 있다.
옆구리로 아기장수를 낳은 할머니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완주군 용진읍 신지리에 전하고 있다. 용진읍의 박씨 집안의 부인(용진읍의 박장렬의 증조할머니라는 설도 있음)이 옆구리로 아기장수를 낳았다. 마을 앞쪽 강과 산이 만나는 곳에 깊은 둠벙이 있고, 그 속에 퉁수바위가 있었다. 아기장수를 낳던 날 밤, 갑자기 나타난 호랑이가 이 퉁수바위로 박씨 집안의 부인을 물어다 놓아 퉁수바위 위에서 아기장수를 낳았다. 아기장수는 어머니에게 자신을 낳았다는 소문이 나면 다시는 자신을 볼 수 없을 테니 절대 소문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기장수의 어머니는 아기장수를 낳았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다. 아기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자 마을에는 아기장수의 어머니가 서방질했다는 등 안 좋은 소문이 퍼졌다. 몇 년 동안 그런 소문에 시달리며 지내던 아기장수의 어머니는 자신이 옆구리로 아기장수를 낳았다고 옆구리의 흉터를 보이면서 말했다. 그 이후로 다시는 아기장수가 오지 않았다. 그 후 삼밭에서 함께 일하던 마을의 여자들이 억지로 아기장수의 어머니 옆구리 흉터를 보기도 했다.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응향당(凝香堂)과 울지 못한 개구리'는 응향당 개구리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잠을 이루지 못한 강감찬장군이 부적을 써서 개구리를 울지 못하게 했다는 신이담이다. 순창읍 순화리에는 응향당이라 불리는 연못(둠벙)이 있다. 이 연못은 금산 일대에서 발원한 물이 옹성보를 거쳐 옥천동을 흘러와 형성된 못이었는데, 그 규모가 대단했다. 응향당 가까운 곳에는 객사가 있어 순창군에 온 벼슬아치나 귀빈들은 이곳에서 묵으며 일을 보았다.고려 현종 때 강감찬 장군도 이곳 객사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강감찬 장군이 객사에 머물게 된 그날 저녁 유난히도 응향당의 개구리들이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강감찬 장군은 요란한 개구리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인을 불러 무슨 개구리가 이렇게 요란하게 우느냐고 하였다. 하인들이 소리를 지르고 돌을 던져 개구리 울음소리를 멈추게 하였다. 하지만 개구리 울음소리는 돌을 던질 때만 잠시 멈출 뿐, 시간이 좀 흐르면 개구리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하인들이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인들이 고충을 이야기하자 강감찬 장군은 하인에게 부적을 써 주면서 응향당에서 개구리를 잡아 이 부적을 개구리 등에 붙여 놓으라고 하였다. 하인이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 등에 부적을 붙여 놓았더니 응향당 개구리들이 더 이상 울지를 않았다. 이때부터 응향당에서 개구리 울음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익산 사자암은 백제 때부터 있었던 사찰이며 지명대사가 창건했다. 지명대사는 무왕에게 사자암 근처에 미륵사를 세울 것을 권하였다. 지명대사는 신의 조화로 미륵이 현신한 둠벙(연못)을 하룻밤 새에 메우고 그 자리에 미륵불 3기를 세웠다. 일제강점기 말에 사자사에 민율이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민율은 세상일이 돌아가는 형세나 명당자리 같은 천하사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어디에 묏자리를 써야 부자가 되고 가난해지는지, 지리를 잘 보는 것으로 유명하여 사람들에게 땅 보는 일들을 하여 주며 사자사를 유지하였다. 그 뒤로 사자사는 형편이 기울어져 근근이 유지됐다. 한때 마을에 물이나오지 않은 적이 있었는데, 사자사 승려들이 조화를 부려서 마을에 물이 마르지 않고 계속 나온다는 전설이 있다.
제주방죽(둠벙)은 김제지 부량면 소재지에서 동남쪽 약 2㎞ 지점 월승리 명금산 아래 있던 옛 연못으로, 1925년 논으로 바뀌었으나 주민들은 지금도 이에 대한 기억과 정평구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물오리를 팔아먹은 정평구’는 제주방죽의 물오리를 두 번이나 팔아먹은 사기성공담이자 지략담이다. 이를 ‘제주방죽 물오리를 판 이야기’, ‘물오리 두 번 판 정평구’라고도 한다. 정평구는 헤엄을 잘 쳤다. 물 속에서 물오리 흉내를 내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정평구는 물오리 탈을 쓰고 헤엄을 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양 사람이 제주방죽에 놀러왔다가 정평구의 말을 듣고 물오리가 탐이 났다. 그래서 헐값으로 사가라고 권하는 정평구의 말에 솔깃해 제주방죽에 있는 수천 마리의 오리 중에서 반수를 계약했다. 정평구는 증거 표시로 몇 마리를 잡아서 한양 사람에게 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한양 사람은 자기가 사두었던 오리를 잡으려고 사람을 놓았는데 사람들이 잡으려고만 하면 오리는 전부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화가 난 한양 사람이 정평구에게 속았다면서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런 일 정도에 호락호락 넘어갈 정평구가 아니었다. 정평구는 도리어 자기가 애지중지 기른 물오리를 전부 날려 보냈다면서 날려 보낸 물오리를 변상하라고 청구 소송을 냈다. 청구 소송에서 이긴 정평구는 오히려 나머지 반수의 물오리 값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래서 후일에 사람들이 정평구의 이 사건을 두고 정평구가 제주방죽의 물오리를 두 번이나 팔아먹었다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엽마을과 연못’은 연꽃이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 무주군 설천면 청량리 하엽마을로 이사를 와서 잘살던 김선비가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국[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자리에 기와집을 짓자 연못이 말라 농사를 망쳤다는 명당 파손담이다. 하엽마을은 여름 내내 연못에 연꽃이 피어 은은한 향기가 퍼지는 곳이다. 이웃에 사는 가난한 김 선비가 고생하는 처자식을 위해 이곳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김 선비는 농사가 잘되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자 기와집을 짓고 만족스러워 했다. 하지만 기와집을 올리자마자 연못은 점점 말라가고 농사는 망쳤다. 이에 청량사 주지 스님에게 도움을 구했다. 청량사 주지 스님은 김 선비의 과욕으로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국의 명당자리[연화부수형]에 기와를 올려서 연꽃이 시들어버린 것이라고 했다. 김선비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기와집을 헐고 마을을 떠났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을 ‘하엽(荷葉)’ 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마을에서는 아무리 부자라도 기와집을 짓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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