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연교수의 전북문화재이야기]조선시대 민간외교의 결실, 익산의 망모당 현판

"망모당 현판은 송영구와 주지번의 국경을 초월한 사제간의 정과 문화가 깃들어 있는 소중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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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연(서예가,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초빙교수)



익산시 왕궁면에는 중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사제간의 정을 맺은 두 선비의 역사가 담긴 ‘망모당(望慕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이 있다. 이곳은 중국 명나라의 정치가이며, 명필가인 주지번(朱之蕃, ?~1624)과 익산출신 명재상 표옹 송영구(瓢翁 宋英&;, 1556~1620)의 가슴 진한 사제의 정이 묻혀 있는 곳으로, 주지번이 1606년(선조 39) 명나라 황제가 첫 손자인 황태손을 얻는 기쁨을 주변국에 알리기 위해 보낸 사신단의 정사(正使) 한림원수찬(翰林院修撰)을 자청하여 조선에 입국한 후, 스승의 은혜를 갚기 위해 수소문 끝에 찾아온 곳이기도 하다.

송영구는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장암(당시 전주부 우북면) 출신으로, 증좌승지 송억수(宋億壽)의 손자이며, 증이조참판 송영(宋翎)의 아들로, 성혼(成渾, 1535~1598)의 문인이였다. 1584년(선조 17)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한 후, 1592년(선조 25) 도체찰사 정철(鄭澈, 1536~1593)의 서장관으로 북경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등과하기 위해 여러 번의 실패를 참아내며 공부하고 있던 주지번을 우연히 알게 되어 많은 가르침을 주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송영구는 사신일행이 묵고 있던 북경의 객사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때던 주지번이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을 외우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이유를 물어보니 남월(南越) 출신으로서 과거를 보기 위해 북경에 왔으나 번번이 낙방하여 다시 시험을 치르기 위해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객사에서 잡부로 일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답변을 듣고 가상히 여겨, 직접 공부하고 있는 부분을 자세히 물어보니 문장의 이치는 많이 깨우쳤지만 답안지를 작성하는 방법에서 미흡한 점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시험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의 작성요령을 알려주고 가지고 간 서책과 함께 학비에 보태라고 돈까지 주었다.

그 후 주지번은 3년 뒤인 1595년(萬曆 23년)에 당시 회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우시랑(&;部右侍&;)으로 관직을 시작하면서 유교는 물론이고 불경까지 통달하여 초굉(焦&;) · 황휘(黃輝)와 더불어 3대 학자로 불릴 만큼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주지번은 늘 어려웠던 시절에 도움을 준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가 1606년에 조선 사신단의 정사로 자청하여 오게 되었고, 입국하자마자 맨처음으로 오매불망하던 스승 송영구를 찾기 위해 전북땅을 밟은 것이다. 당시 주지번의 입국은 조정에서도 큰 화두였으며, 성대한 환영과 더불어 많은 백성들의 관심의 대상이였다. 바쁜 공무와 일정 가운데에서도 수소문 끝에 송영구가 부친상을 당한 뒤 익산 후원의 구릉에 누당인 망모당을 지어 조상들을 늘 망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가면서 스승과의 해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주지번은 이 망모당에서의 해후를 기념하기 위해서 두가지 흔적을 남기었으니 하나는 직접 `망모당'의 현판글씨를 해서로 써 주었고, 또 다른 하나는 송영구의 사후묘지 자리를 익산시 왕궁면 동몽리에 잡아주고 떠났다고 한다. 이렇게 남겨진 `망모당'의 현판은 지금도 왕궁리 망모당에 국경을 초월한 두 선비의 스토리를 품에 안은 채, 송영구의 초상화와 함께 왕궁 들녘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이 여정에서 전주감영에 들러 `풍패지관(豊沛之館)'의 현판을 초서로 써서 전주가 풍패지향이였음을 입증하게 해 주었을 뿐아니라 주지번은 당대 최고의 명필로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많은 문인들, 서화가들과 교류하며 수준 높은 친필 묵적을 남겨 선조의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지금 국내에 남아 있는 주지번의 묵적으로는 `영은문迎恩門'(서울)·`명륜당明倫堂'(서울 성균관대)·`문회서원文會書院'(황해도 배천군)·`옥류천玉溜泉'(황해도 평산군 안성면)·`제일강산第一江山'(강릉 경포대)·`소수서원 문성공묘'(경북 영주)·`호산승집湖山勝集'(괴산 고산정) 등이 있으나. 특히 전북지방에 남긴 두 개의 현판은 국경을 초월한 두 선비의 특별한 사제간의 인연관계에서 탄생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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