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 밖 망대에서 숙직하던 왜놈을 활로 쏘고 수급을 베어 와 바쳤다고 했는데, 지금 다시 들으니 왜놈의 머리가 아니라 목화를 따다가 적에게 살해되어 버려진 무주 백성의 머리였다”

옛 이야기에서 전북을 만나다:쇄미록 장수군에서 임진왜란 만나 한 끼에 7홉의 쌀로 밥을 지어먹은 오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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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096호 오희문 쇄미록(吳希文 &;尾錄)은 임진왜란 때 오희문(1539∼1613)이 난을 겪으면서 쓴 일기로, 선조 24년(1591)∼선조 34년(1601) 2월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오희문은 학문에 뛰어났으나, 과거급제를 못해 정식으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 오윤겸은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손자인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 청나라까지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三學士)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조선 중기에 선공감 감역을 지낸 비연(斐然) 오희문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곳으로 피난하며 10여 년간 쓴 일기이다. 1991년 9월 30일에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되었다.

‘쇄미’의 뜻은 『시전(詩傳)』북풍(北風) 모구장(&;丘章)에 있는 “쇄혜미혜 유리지자(&;兮尾兮 流離之子)”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피난에 대한 기록이란 의미이다. 일기의 끝에 “이제 종이도 다하고, 또 서울에 다시 돌아와 유리(流離)할 때도 아니므로 붓을 그친다.”고 서술하여, 이 글의 목적이 피난 중의 일을 기록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임진년 이전인 신미년, 즉 1591년 11월 27일 한양을 떠나 경기도 용인에 사는 처남 서당에서 머문 이야기를 시작으로 1601년 2월까지 9년 3개월간 일기를 썼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남도로 발걸음을 옮긴 오희문은 또 다른 처남이 수령으로 있는 전라도 장수현에 갔다가 1592년 2월 충청도 영동과 황간에서 외가 친척을 만나고 다시 장수로 돌아온다. 이어 그해 3월에 다시 길을 떠나 전라도 각지를 두루 순례하고 4월 13일 장수에 도착한다. 그런데 며칠 뒤부터 왜선 수백 척이 부산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고, 오희문은 각종 풍문과 문서를 글로 남기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는 10년 여 동안 장수, 홍주, 임천, 평강을 거쳐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오희문은 당시 왜적이 장수 인근 고을을 침략하고 노모와 처자의 생사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각종 문서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소문의 전달자, 문서 작성일시와 작성자를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오희문은 해주 오씨로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처남인 이빈(李贇)이 장수 현감으로 부임하자 장수에서 멀지 않은 황간의 외가를 방문하고, 또 자신 소유의 전라도 노비들에게 신공(身貢)도 걷기 위해 장수현에 들렀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울로 가지 못하고 장수에 머물면서 ‘피난 일기’를 썼다.



‘임자중(任子中)이 집노루 고기를 가지고 와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요월당에 앉아 배불리 먹었다. 마침 술이 없더니 추로(秋露) 한 병을 얻어서 경흠의 서모(庶母)의 집에서 각각 석잔 씩을 마시고 헤어졌다.’(且任子中 備家獐而來 與洞人輩相與坐於邀月堂飽食 而適無酒 覓得秋露一壺 於景欽庶母家 各飮三杯而罷)



는 기록처럼,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장치로서 술을 자주 접했던 기록도 많이 나타난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종정도(從政圖), 쌍륙(雙六) 등 여가 생활을 즐기던 모습도 나타난다. 병과 약재 처방에 대한 기록도 흥미를 끈다.



‘또 오늘은 어머님께서 학질을 앓으실 날이어서 일찍 학질 떼는 방법 세 가지를 했다. 하나는 복숭아씨를 축문(呪文)을 외우면서 먹는 것이고, 하나는 헌 신 밑장을 불에 태워서 물에 섞어 먹는 것이요, 하나는 제비 똥을 가루로 만들어 술에 담가가지고 코 밑에 대어 냄새를 맡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옛날 쓰던 방법으로서 효력이 가장 있다고 해서 하는 것이요, 또한 하기도 어렵지 않은 것이다'



쇄미록은 전쟁 시기인데도 한 끼에 7홉의 쌀로 밥을 지어먹었다고 했다. 당시의 7홉이라면 지금의 420그램에 버금가는 양이다. 오늘날 한국인이 한 끼에 약 140그램의 쌀을 먹는다고 하면 거의 세 배에 이르는 쌀밥을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시기에도 쌀을 7홉이나 먹었다고 하니 밥을 대식(大食)해야 한다는 생각은 평소에도 가졌던 것이라 여겨진다. 먹을거리가 눈앞에 보이면 아무리 폭식을 했다고 해도, 결국 쌀밥을 많이 먹는 데 목숨을 걸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대식의 쌀밥을 위해서 나라에서도 곡물 생산에만 집중했다.

‘쇄미록’에는 도망 노비에 대한 기록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일하기 싫어 도망하는 경우도 있고, 이미 다른 종과 혼인한 사내종과 계집종이 눈이 맞아 도망하기도 했으며, 붙잡혀 왔다가 도망치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또한 현물이 오가는 운반 과정에서 일부 수량을 가로채지 않을까 하는 의심으로 주인과 노비 사이에는 늘 긴장감이 흘렀다.



“명복이 함열에서 왔다. 함열 현감이 정미 3말, 생준치 2마리, 꿀 5홉, 녹두 1되를 보냈는데, 다시 되어 보니 쌀 5되가 줄었다. 준치와 꿀은 길 가던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어두워져서 돌아온 걸 보니 분명 고기를 찌고 밥을 지어 먹은 게다. 병을 앓는 집에서 꿀을 구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니, 분명 도중에 팔아서 쓰고는 빼앗겼다고 핑계를 대는 것일 게다. 몹시 괘씸하고 얄밉다. 충아 어미와 인아가 아파서 이것들을 가져오면 죽을 쑤어 먹이려고 했는데, 잃어버렸다고 핑계를 대니 더 화가 난다.”(갑오일록, 1594년 5월 8일)



관군에서 도망쳐 나와서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숨어 관곡이나 축내는 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는 왜군의 수급이라고 속이고 살해된 백성의 수급을 가져다 바치는 현실도 고발했다. 그렇지만 김면, 곽재우와 같이 제 역할을 하는 의병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지난번에 어떤 의병이 밤에 무주 적진으로 들어가 진영 밖 망대에서 숙직하던 왜놈을 활로 쏘고 수급을 베어 와 바쳤다고 했는데, 지금 다시 들으니 베어 온 것은 왜놈의 머리가 아니라 목화를 따다가 적에게 살해되어 버려진 무주 백성의 머리였다. 머리털만 제거한 뒤 베어 온 것이다. 의병장이 그런 줄도 모르고 왜놈의 머리라고 여겨 순찰사에게 수급을 바쳤다고 한다. 참으로 우습다.”(임진남행일록, 1592년 9월 13일)



긴장관계는 평소에 경작에 사역하는 노비와의 사이에서도 발생했다. 풀을 베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불순한 말을 하는 종의 발바닥을 때리며 응징하기도 하고, 게으름 피우는 노비들의 일터에 불시에 들이닥쳐 혼찌검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노비들도 자신들이 직접 경영하는 생업에는 매우 열심이었다. 전쟁 중에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경험도 없던 양봉(養蜂)에 손을 댔다가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었던 오희문으로서는 자기 몫의 양잠에만 열중하는 노복이 밉기 마련이었다.



“채억복에게 벌통을 지워 보내서 곧장 전날에 온 벌통 오른쪽에 앉혔는데, 오후에 양쪽 벌들이 서로 싸워 물려 죽은 벌이 거의 1되 정도 되었다. 아깝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싸움을 말릴 방법이 없어서 날이 저물어 각각 벌집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린 뒤에 먼 곳으로 옮겨 앉혔다. 벌의 종류가 다르면 싸워서 죽이는 것이 이와 같으니 탄식할 일이다.”(무술일록, 1598년 3월 8일)



기해년(1599) 일록을 보면, 임진왜란이 나서 피란살이 중임에도 메밀국수를 만들어 왕에게 올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제수로서 국수가 중요하였음도 알 수 있다.

1592년 7월의 여름은 오희문에게 무척이나 더웠다. 피난의 고통이 처절했던 것은 7월 초부터 한 달 이상 거의 매일을 산 속 바위 밑에서 지낸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 초 4일: 산 속에서 바위 밑에서 잤다.

- 초 5일: 산 속 바위 밑에 있었다. 아침에 사람을 보내서 현에 가서 적의 소식을 알아오게 하고 또 두 종을 보내서 감추어둔 바위구멍에서 옷을 가져다가 추위를 막을 계획을 세웠다.

- 초 6일: 산 속 바위 밑에 있었다.…… 꿈에 경여 내외를 보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 초 7일: 골짜기 산 속 시냇가에서 잤다. 이 날은 곧 칠석 가절(佳節)이다.…… 갓모를 쓰고 밤을 새웠다. 이 밤의 괴로움은 입으로 형용해 말할 수가 없다. 꿈에 윤겸이 보이는데 딴 사람은 관동(館洞) 별실에 있고 윤겸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기둥 밖에서 절을 했다.

- 초 8일: 골짜기 속 시냇가에서 잤다. 이 날은 곧 선군의 생신이다.

- 초 9일, 10일: 골짜기 속 시냇가에서 잤다.

- 11일, 12일: 산 속 바위 밑에서 잤다. 대개 적의 형세가 번져서 전일에 진안에 있던 적은 웅현(熊峴)을 넘어서 전주 땅에 진을 쳤고 영남의 적은 이미 무주 경계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합세해서 진주성을 삼키려는 것이다.



- 8월 초 1일: 산 속 바위 밑에서 잤다. 내가 산 속에 들어온 후로 장차 한 달이 넘어 절기가 중추로 접어드니 찬 기운이 사람을 엄습하여 갑절이나 처량하다. 깊이 노모와 처자를 생각하면 지금 어느 곳에 있으며 아직도 보존하고 있는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비통하지 않으리오.



전쟁에서 저자 오희문이 경험한 여러 참상들에 대한 기록들은 당대에도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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