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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향기] 최학자 금재 최병심의 항일의식

“일제의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성균관 부관장에 추대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0년 08월 13일 14시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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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재 최병심은 전주의 토호인 전주 최씨 후예이다. 전주는 많은 성관을 배출했던 지역으로 전주 최씨는 전주 이씨, 전주 유씨와 함께 전주를 대표하는 토성이다. 조선시대에는 당연히 전주 이씨가 최고로 벌족했지만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전주 최씨가 전주 토성 중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조선 초 관찰사 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전주부 인물조에 실린 고려시대 인물 14명 중에서 8명이 전주 최씨다.

금재 최병심(欽齎 崔秉心)은 문성공 최아의 후예로 한벽당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초 월당 최담(月塘 崔霮)의 17세손이다. 최담은 최아의 증손이며 중랑장(中郞將) 최용봉(崔龍鳳)의 손자로 중랑장파로 분류된다. 최담은 고려때 1346년(충목왕 2년)에 태어나 1377년(우왕 3년)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초 태상시소경(太常侍少卿)을 지내고 진주 수령으로 있다가 본향인 전주로 내려와 살았다. 그는 71세 되던 1416년(태종 16년)에 검교호조참의 집현전 제학에 제수되었으며 1434년(세종16년) 89세로 졸하였다.

최담은 또 4명의 아들 광지(匡之), 직지(直之), 득지(得之), 덕지(德之)가 벼슬길에 나가 출세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최득지가 고산 수령으로 있을 때 물, 돌, 소나무가 빼어 나다고 하여 삼기라고 써 준 자리에 정자를 짓고 삼기정(三奇亭)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하연의 `경제문집'에 나온다. 한벽당은 최담이 낙향하여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하던 옛터에 세워진 것으로 한벽당은 1898년 개축한 것이다.

금재는 1874년(고종 11년) 전주시 교동 한벽당 옆 세칭 옥류동에서 태어나 1957년 그 곳에서 향년 84세 일기로 작고하였다. 그는 간재 전우(艮齋 田愚)의 수제자의 하나로 간재의 호남 문인을 대표하였다. 간재(1841~1922)는 전주 출신으로 조선 말 유학계를 대표하는 거유의 일인으로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간재는 금재의 비범함을 발견하고 우리 유학을 계승 발전시킬 대업을 맡길만 한 인재라고 칭찬하고 서전(書傳)에 나오는 글귀에서 금(欽)자를 따 금재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을사늑약(乙巳勒約)과 경술국치(庚戌國恥). 을사년(1905년)에 일본의 강제에 의해 맺어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일본이 대한제국정부를 강압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체결된 공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다. 금재는 이에 맞서 `을사오적선참격문'을 작성, 배포하다 압수당했다. 5년 후 경술년(1910년) 국치(國恥)의 소식을 들은 금재는 발산(鉢山)에 올라 하루 종일 통곡하고 상시(傷時)를 읊은 뒤 7일 동안 단식 하였다고 한다.

상시(원문생략)

“시대를 서글퍼하며” 요즈음 세상일은 어느 것 하나 맘 상하지 않는 게 없으니/ 어둠은 언제쯤 가고 다시 빛을 볼거나/ 수풀 사이 까마귀 우는 소리 시끄럽고/ 세상은 온통 말 같지 않은 말만 하는 무리들로 가득하니/ 구름 한 점 없이 온 세상에 갠 날이 오면/ 봉우리마다 달이 떠올라 밤도 오히려 밝으리/ 가슴에 찬 회포 억제하기 어려워/ 등잔불 심지를 돋우며 하천장을 읽네.

하천장은 시경(詩經) 조풍(曹風)에 나오는 노래로 나라가 혼란할 때 현철한 임금이 나와서 어지러운 세상을 잘 다스려 주기를 바라는 시이다.

한전(韓田) 사건 (한전은 우리나라의 땅이라는 뜻). 금재의 무저항 배일사상을 도저히 꺾을 수 없음을 간파한 일제는 1917년 옥류동 일대에 잠업소를 설치한다는 구실로 최씨 가문에 대대로 전수해 온 대지를 매도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금재는 토지를 내줄 수 없다고 강하게 반대함으로 총독부로 하여금 토지수용령을 발동시켜 가옥을 소각한 후 기어이 땅을 빼앗고야 말았다. 금재가 거절로 일관하자 8월 20일 도지사는 이 사실을 총독부에 보고, 순경 30여명과 소방서원 90명 등 120여명을 보내 항거하던 가족들이 유혈이 낭자하도록 맞았고, 금재부인 통천 김씨는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채 가족이 모두 경찰서에 연행되어 갔고 부인은 폭행의 후유증으로 1919년에 세상을 뜨고 만다.

또한 금재가 45세 때 일제는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하고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자 전국 유림에 탄핵 통문을 돌리다 괴산 경찰서에 7일간 구류되기도 했고, 1937년 친구 조희제가 한말 독립투사들의 비사(祕史)를 엮은 염제야록에 춘추대의적 민족자존의 의지를 밝혀 서문을 쓴 일로 조희제와 함께 임실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독립자금을 여러 번에 걸쳐 건내기도 했다. 금재는 평생을 왜놈들과 싸우다 1957년 윤 8월 10일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상여 뒤 많은 조객들이 호남의 유학은 이제 빛을 잃었다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가 살았던 집이나 강학을 하였던 서당은 남아있지 않아 아쉬움이 있다. 금재는 수천의 제자를 길러냈으며, 이처럼 유학의 흔적을 보존하고 한옥마을의 위상을 높이는 방법은 없을지 관계당국에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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