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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죽음은 착각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0년 08월 05일 13시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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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혜(심상 시치료 센터장·전주대 겸임교수)



하늘과 땅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가끔 신이 존재하는지 의심하는 일이 벌어진다. 지난 3일 집중호우가 쏟아진 경기 가평에서 토사가 펜션을 덮쳐 3명이 숨졌다.

천재지변으로 잃은 목숨은 불가항력이다. 사망한 이는 펜션 주인과 그녀의 딸과 이제 겨우 두 살인 손자다. 사건이 일어난 3일 오전 10시 37분 이전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는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똑똑하고 영특한 기술을 뽐내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바니타스(Vanitas)는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유행한 정물화의 한 장르이다. 중세 말에 흑사병이나 종교 전쟁 등 여러 비극적인 경험으로 인하여 일어난 풍조다. 그림 속에 해골이나 촛불, 꽃 등을 그려 넣는 특징이 있다. 이들 피사체가 상징하는 것은 바로 삶의 덧없음이다. 성경의 전도서 1장 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공허’를 뜻한다. 인간의 삶은 공허하기 그지없다. 언제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생각해보면, 희로애락이나 원망과 분노와 좌절과 낙담도 살아있어서 갖게 되는 감정이다. 부귀영화와 무한경쟁이 무슨 소용인가.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덧없다. 죽음조차도 자연의 일부이다. 그냥 받아들일 뿐,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다. 과학기술이 놀랄 만큼 발전해서 죽음을 연장하거나 없앨 수 있다고 상상해보는 것도 사실 부질 없다. 그런다고 행복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자연 안에서 숨 쉴 때 가장 자연스럽다. 이왕 언급했으니, 성경 구절을 더 더듬어보자. 전도서 1장 9절의 말씀이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이것은 또 어떤 뜻인가. 사망을 한 후에 끝이 아니라는 것인가? 게다가 이 땅에서 한 일들을 다른 차원의 세계인 사후세계에서 다시 하게 된다는 것인가? 그렇다. 죽음은 착각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리상태를 연구하고 밝혀낸 정신의학자 퀴블러 로스는 생애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연구를 하게 된다. 그리고 발표한 것이 바로 ‘사후생’이다. 그녀는 “죽음이란 나비가 고치는 벗어던지는 것처럼 단지 육체를 벗어나는 것에 불과하다. 죽음은 당신이 계속해서 성숙할 수 있는 더 높은 의식 상태로의 변화일 뿐이다.”라고 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목숨을 주관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그 엄청난 역할은 하늘에 맡겨두고 다만 현재, 지금, 여기에서 내 영혼을 고양하기 위한 일에 매진할 뿐이다. 죽음이 있다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지금을 헛되게 살 수 없다. 육체의 삶 동안 극복했던 만큼 사후의 삶이 이어질 것이다. 빌 노트의 ‘죽음’이라는 시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잠을 자면서 나는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개 얹는다. / 사람들이 나중에 내 손을 이렇게 얹어 놓겠지. /내가 내 안으로 날아 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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