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전8승의 화려한 전적에 빛나던 20대 복서 박춘봉은 돌연 스패너를 손에 잡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 부모와 형제들의 걱정이 글러브를 내려놓게 한 이유다. 하지만 방황은 길지 않았다. 운동을 그만둔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동차.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어 절망하던 그에게 자동차 정비사는 인생 제2막을 열어준 원동력이 됐다. 20대 청년 정비사에서 어느덧 환갑을 앞둔 그의 새로운 목표는 ‘대한민국 명장’이다.
△머릿속은 온통 복싱, 전적 8전8승의 사나이
지금은 전주비전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박춘봉(59)씨는 남원의 한 과수원집에서 태어났다. 5형제 중 막내로 귀여움을 독차지 했던 그는, “과수원 일을 도우라”는 부모님 뜻을 거스른 첫 번째 자식이 됐다. “그 당시 체육계는 고(故) 김일 선생이 주름잡고 계셨어요, 중계방송을 우연히 봤는데 심장이 막 뛰더라고요.” 부모의 반대에도 권투선수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왕복 6㎞의 길을 오가며 운동을 시작했다. 콤플렉스였던 큰 손은 복싱에 안성맞춤이었고, 집과 체육관을 오가는 길은 체력의 기반이 됐다. 관장님의 권유로 고등학교 졸업 후 무작정 서울 가는 기차에 오른 그는 8전8승의 유망주로 성장해 갔다.
△학창시절 다 받친 꿈 포기, 새로운 도전의 시작
복싱에 대한 애착은 해가 바뀔수록 커졌다. 장충체육관을 주름잡던 당시만 해도 복싱은 꿈이자, 행복이었다. 하지만 선수 인생은 어머니가 관절 수술을 받으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일주일의 휴가를 받고 곧 바로 남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만난 식구들은 “운동을 그만둬 달라”고 사정을 했다. 새파란 멍 자국들은 가족의 반기에 힘을 실어줬다. “죽을 만큼 맞고 때려서 누구 하나 쓰러져야 하는 운동이다 보니 제 나이가 들수록 가족들 걱정은 커졌지요.” 결국 아버지는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초강수를 띄웠다. 가족의 반대와 운동선수수명, 꿈이란 보기 속에서 고민하던 24살 청년은 10년 동안 함께한 글러브를 내려놓게 됐다.
△도전의 연속…점심저녁시간 쪼개 공부 매진
권투를 그만두고 안정적인 직업을 찾던 그의 눈에는 자동차가 들어왔다. 배운 건 없지만 몸 쓰는 일은 다 잘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무작정 정비소를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복싱선수로써의 생활은 오히려 독이 됐다. “복싱선수 이력밖에 없으니까, 이력서를 보고 다들 깡패로 오해하더라고요” 사람 구한다는 곳은 다 돌며 이력서를 들이민 끝에 전주 팔복동 한 정비소에서 일을 배우게 됐다. ‘시켜만 주면 뭐든 다 하겠다’는 마음가짐도 채용에 한 몫 했다. 도시락을 든 실습생은 6개월 동안 무보수로 일을 시작했다. 수습 기간이 끝나자 손에 쥐어진 월급은 고작 4,000원. 하지만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더 큰 시장에 나가고 싶다는 욕심이 커져갔고, 가슴 한쪽엔 ‘현대차’라는 목표가 생겼다. 그때부터 도시락과 함께 손에 들린 것은 책이었다. ‘기술 변화 속 살아남기 위해 공부해야 된다, 정비판을 바꿔보리라’ 점심, 저녁 시간을 쪼개며 책 만 봤다. 이 탓에 주변 시선은 곱지 않았지만, 그렇게 붙든 책은 약 2년 만에 기아자동차로, 30대 초반의 청년을 현대자동차로 이끌었다.
△늦깎이 대학생, 산업현장 교수, 그리고 명장
어디에서나 존중받는 기술자가 되자는 꿈은 그를 대학으로 이끌었다. 나이 50세에 주책이란 소리도 들었지만, 비전대학교 자동차학과에서 늦깎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일과 학습을 병행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 대신 잠을 줄이는 걸 선택했다고 한다.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하면 집에도 들어가지 않아 가족들 속을 태웠다. 비전대 졸업 후 전북대 기계공학 석사학위를 따내기까지 사용한 볼펜만 59자루. 같은 기간 자동차 기술 관련 책 8권, 기술특허 7건, 20여 개의 자격증까지 따냈다. 수백 대 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라는 타이들도 거머쥐었다. 차량기술사와 비전대 겸임교수, 때로는 김제마이스터고&;군산교도소 교정교육자 등으로 불리는 박 교수. 매 순간 도전해 온 그에게 새로 생긴 목표는 ‘대한민국 명장’이다. 박 교수는 “전북지역에 명인제도가 있지만 기계나 정비 쪽으로는 그렇게 활성화 돼있지 않다”며 “전문직 처우개선을 위해서라도 명인 폭을 넓혔으면 한다”고 했다. 이어 “60이 되는 내년, 지역 명인을 뛰어넘어 대한민국 명장이 되기 위해 도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양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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