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직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무력화되던 날 한국 사회는 깊고도 장기적인 균열을 경험했다. 친일 청산이 좌절되자 일제에 협력했던 인물들은 다시 국가 권력의 중심으로 복귀했고, 정치·사법·행정 전반은 이들의 이해와 관성이 반영된 구조로 굳어졌다. 이러한 후퇴는 단순히 과거의 실패가 아니라, 이후 한국 국가체계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할 것인지 결정짓는 분기점이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가 중요한 선택의 순간을 맞을 때마다 잠재된 문제는 다시 떠올라 오늘의 민주주의를 흔들었다.
2024년 12월 3일의 비상계엄은 이러한 역사적 연장선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날 국가 권력 일부는 헌정 질서를 뒤흔들며, 헌법이 부여한 권한의 경계를 넘어서려 했다. 계엄이라는 조치는 국가의 극단적 위기 상황에서만 사용될 수 있음에도, 이를 정치적 목적이나 권력의 연장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면 이는 헌정 질서를 정면으로 위반한 중대한 행위다. 시민들은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가 스스로 법을 넘어설 때, 시민의 권리는 무엇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가? 위헌적 명령을 수행하거나 이를 방치한 이들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는 단순히 사안을 규명하는 절차를 넘어,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반드시 던져야 하는 근본적 질문이다. 1949년 반민특위의 실패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남겼다. 원칙을 어긴 권력을 제어하지 못하면, 그 위법은 형태를 바꾸어 반복된다. 반민특위가 해체된 이후 국가 권력은 여러 차례 ‘안정’과 ‘질서’를 명분으로 삼아 필요 이상의 권력을 행사했고, 이는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특히 준법과 절차를 무시하는 문화는 한 번 자리 잡으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2024년의 비상계엄도 같은 구조를 드러냈다. 헌법이 규정한 절차를 생략하거나 우회하는 순간, 국가는 법치주의가 아닌 권력주의적 방식으로 기울게 된다. 민주주의는 단지 투표로 구성되는 체제가 아니라 절차적 정당성과 권한의 제한이라는 원칙이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유지될 수 있다.
따라서 계엄을 지시·기획·집행한 이들뿐 아니라, 이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방관하거나 묵인한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과거의 보복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민주주의를 보호하고 미래의 위기를 막기 위한 필수적 조치다. 책임 없는 권력은 언제든 폭주할 수 있고, 역사 속에서 그 피해는 늘 시민의 몫이었다. 반민특위의 실패는 이후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의 무책임이 오늘날까지도 구조적 문제로 이어져 왔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책임 규명이 필요하다. 헌정 질서를 훼손한 행위는 결코 개인의 실수가 아니며, 공동체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중대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사안에 대한 단죄는 제도적 재발 방지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책임을 묻는 과정은 단순히 관련자를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향후 어떤 권력도 동일한 방식으로 헌법을 위협할 수 없다는 사회적 경고이자 민주적 안전장치다. 시민이 권력을 감시할 수 있는 장치, 국가의 긴급 권한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도 헌정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내려야 하는 결단은 한 시대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다음 세대가 같은 위험을 겪지 않도록 민주주의의 기초를 단단히 다지는 작업이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 사회를 시험하고 있으며, 이번 시험에서조차 책임을 묻지 못한다면 역사는 또다시 우리를 같은 자리로 되돌릴 것이다.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지킬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역사는 지금도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김상근연구교수 (공공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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