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백범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암살범이지.”
구한말의 민족운동가,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은 1876년 음력 8월 29일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나 1949년 6월 26일(향년 72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1가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의해 서거하였다. 암살범 안두희는 당시 이승만 정권의 두둔과 비호로 말미암아 처벌은커녕 당시의 국방부 군수물자 납품 특혜로 호의호식하며 지냈다.
이에 박기서 의사가 나섰다. 그는 전북 정읍시 산외면 상두리 진계마을 출신이다. 김구 선생을 평생토록 존경하여 오랫동안 백범 선생을 기리는 현양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경,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 인천 자택에 찾아가 자신이 손수 제작한 정의봉(正義棒)으로 때려죽였다. 재판부 1심에서 5년형, 대법원에서 3년으로 감형되었다. 1998년 3.1일절 사면대상자에 포함되어 동년 3월 13일 출소하였다. 수감된 지 1년 5개월 만이었다.
지난 6월 26일이 백범 선생 서거일이다. 우리 민족의 역적 안두희는 이전에도 여러 의사들의 의거(義擧)로 말마암아 여러차례 응징을 당했다. 제1차 응징자는 1961년 광복군 출신 김용희이다. 그는 종로에서 안두희를 잡아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의 전말을 녹취하여 붙잡은 안씨와 녹음한 녹취록을 검찰에 넘겼으나, 당시 검찰은 일사부재리 원칙과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하였다. 제2차 응징자는 1965년 전북 김제 청년 곽태영이다. 그는 양구에서 안두희를 찾아내서 칼로 목을 찌르고 돌로 머리를 내려쳤다. 죽은 줄로 알았던 안두희는 2차례의 대수술 끝에 가까스로 살아났다. 제3차 응징자는 1987년 권중희이다. 그가 인천 아파트에 찾아가서 두둘겨 패고 나중에 가평 농가에 감금하고 동아일보 기자와 더불어 김구 선생 암살 배후를 캐내어 물었다. 안씨는 “김창룡이가 시켰어, 그리고 미 CIA야”라고 고백하였다. 김창룡이는 1920년 함경도 출신의 악질 친일파이다.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인 특무대의 대장을 맡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육군 관동군의 헌병 소속으로서 항일 무장세력을 토벌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데 앞장섰던 악질 중에 악질이다. 그는 백범 선생 암살을 조종한 범인이다. 1956년 1월 30일 아침, 김창룡은 출근하던 도중 골목길에서 같은 특무대 출신 4명(허태영, 신초식, 송용고, 이유회)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마지막 제4차 응징자는 1996년 박기서 의사이다. 그가 인천 아파트를 찾아가서 정의봉으로 두들겨 패서 죽였다. 만고역적 안두희는 죽기 전까지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를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합참의장 및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형근은 “당시 일개 소령에 불과했던 김창룡으로서는 그 같은 엄청난 일을 혼자 꾸미기는 불가능하다”면서 권력 핵심부의 개입이 있었음을 암시하였다. 보안사령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강창성은 한 인터뷰에서 “안씨의 배후를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밝힐 수 없지만, 적어도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김삼웅 저 『안두희, 그 죄를 어찌할까』, pp.219&;220.)
당시 안씨를 죽인 박기서 의사는 심곡성당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하고 경찰에 찾아가서 “의로운 일을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진술했다. 박기서 의사에게 고해성사를 준 신부님은 이렇게 회고했다.
“박기서 씨는 역사적으로 김구 선생을 죽인 안두희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하는데 불구하고 아직도 역사가 그 일을 하지 않아서 자신이 사명감을 갖고 죽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안두희의 장례와 그의 영혼에 대해 걱정하면서 성당에서 안두희의 장례를 치르는데 도움을 줄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안씨를 두들겨 팬 정의봉 옆에 쓰인 글자는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구절로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라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 갇혔을 때 쓴 글로 유명하다.
정의봉(正義棒)은 박기서 의사가 안두희를 격살할 때 사용한 도구이다. 이 도구는 사건 이후 경찰이 증거물로 압수하였으나 재판 후에 박 의사에게 돌려주었다. 범행 도구는 형 선고 때 선고 내용으로 함께 몰수하여 폐기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물며 여간한 범죄도 아니고 살인에 사용한 둔기를 범인에게 돌려줬다는 점에서 판결을 내린 판사도 이 사건을 일반적인 살인과는 매우 다르게 취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의봉을 정의로운 방망이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안두희 살해에 사용한 정의봉은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되어 역사의 한 자료로 보존되어 있다. /유종국 전 전북과학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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