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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되기 전 실상사수철화상보월탑비 원탁본, 일본 덴리대학 도서관 소장 ‘대동금석서’에

한국학중앙연구원,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발간

기사 작성:  이종근
- 2021년 01월 27일 14시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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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되기 전, 실상사수철화상보월탑비(보불 제34호) 원탁본이 일본 덴리대학 도서관 소장의 ‘대동금석서’에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서울대 중앙도서관, 성균관대 박물관, 일본 덴리대학 도서관 등에 탁본이 남아있지만 이들 모두는 1714년 다시 비석을 세운 뒤의 탁본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다른 탁본이나 비석에는 전하지 않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유일한 탁본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20세기 전반 일본으로 건너간 후, 그 존재 자체가 잊혀졌던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원본을 발견, 조사 연구한 결과를 담은 ‘대동금석서 연구’(지은이 남동신 외)를 통해서다. 신라시대 ‘황초령진흥왕순수비’(568)로부터 조선시대 ‘청풍부원군김우명신도비’(1687)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금석문 280여 종에 대한 탁본 400여 건을 수집, 편집한 󰡔대동금석서󰡕는 17세기 전반 출현한 금석문 탁본첩의 전형을 지니고 있어 자료적 가치가 크다.

남동신 교수(서울대학교, 국사학) 팀이 '대동금석서' 7첩 전체를 최초로 조사 연구, 발간한 이 책은 문헌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 고‧중세사 연구를 보완하고, 조선시대사 연구에서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던 금석문들을 새로운 사료군으로 학계에 알리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실상사수철화상보월탑비는 실상사에 위치한 수철화상의 탑비이다. 수철화상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진성여왕 7년(893) 5월 77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수철화상’으로 적고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는 달리 거북모양의 받침돌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얕게 새긴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두어 그 위로 비를 세웠다. 비를 꽂아두는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연꽃을 둘렀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 용 두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앞면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수법이 형식적이고 꾸밈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비의 건립 연대는 효공왕(재위 897∼912)대로 추정되고,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를 따랐다. 이번 조사를 통해 원탁본을 보고 판독문을 작성할 수 있었다. 비석 하반부는 가장 최근에 긴행된 최경선의 판독문이 정확함을 확인했고, 현존하는 판독문에서 읽지 못했던 상(尙)자를 새롭게 읽어냈다.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의 ‘퇴휴부인묘갈(退休夫人墓碣)’은 양곡 소세양(1486~1562)의 부인이 아닌, 어머니의 묘갈 일부를 탁본했다. 이 비의 탁본은 경성재데에서 영인한 ‘대동금석서(1932)’와 ‘조선금석총람’에 실려 있지 않다. 건립 시기는 소세양이 죽기 1년전 1561년으로 확인된다. 이계맹(李繼孟, 1458~1523)비는 그가 죽은 지 100년이 넘은 1648년에 와서야 김제에 건립됐다. 비문은 김상헌(1570~1652)이 짓고, 조속(1595~1668)이 썼다. 비문에 의하면 조속이 김제군수로 있을 때 이계맹을 사모해 그의 후손들을 김상헌에게 보내어 비문을 받고신도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밖에 금산사혜덕왕사(탑)비(보물 제24호)와 비음(碑陰, 비석 뒷면)도 소개됐다. 이는금산사 안에 서있는 탑비로, 혜덕왕사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혜덕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 1038년에 태어나 11세에 불교의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에 승려가 되었다. 1079년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숙종이 불법(佛法)에 귀의해 그를 법주(法主)로 삼자 왕에게 불교의 교리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59세에 입적했으며, 왕은 그를 국사로 대우. 시호를 ‘혜덕’, 탑이름을 ‘진응’이라 내리었다. 현재 비의 머릿돌은 없어졌으며, 비문은 심하게 닳아 읽기가 매우 힘든 상태이다. 비의 받침돌에는 머리가 작고 몸통이 크게 표현된 거북을 조각했고,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받침돌에 비해 커보이는 듯하며, 주위에 덩굴무늬를 새겨 장식했다. 비문에는 혜덕의 생애·행적, 그리고 덕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글씨는 구양순법의 해서체로 썼는데, 구양순의 글씨보다 더욱 활달해 명쾌한 맛이 있다. 신라나 조선에 비해 고려시대의 글씨가 훨씬 뛰어남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문에 의하면 비를 세운 것은 1111년으로 혜덕이 입적한 지 15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이 비의 앞면은 1933년에 펴낸 ‘금산사지’에 실려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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