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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창]완산(完山)의 탄생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1년 09월 23일 13시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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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전북대학교박물관, 문학박사)







완산(完山)은 전주(全州)의 옛 이름이다. 행정구역상 완주와는 구별되지만, 본디 전주와 완주를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삼국사기』 「잡지(雜志)」의 `지리'조에는 전주·완주 지역에 완산(完山)을 비롯하여 두이현(豆伊縣), 우소저현(于召渚縣), 고산현(高山縣), 지벌지현(只伐只縣)이 있었다고 전한다. 특히 전주에 대한 기록을 「全州本百濟完山」이라고 적었기 때문에 완산의 역사는 백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신라의 관점에서 서술된 기록이기 때문에 바로 원용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지명이 갖는 고유성과 생명력을 고려하면 ‘백제 때의 완산’으로 읽히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럼 완산의 연원은 언제쯤일까? 전주부의 역사와 문화를 집대성한 『완산지(完山誌)』에는 신라 진흥왕 16년(555년)에 완산주(完山州)가 설치되었고, 26년(565년)에 다시 주를 폐지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인용되었다. 그러나 이 기사는 경상남도 창녕에 대한 설명으로, 백제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사』 「지리」의 `전주목'에 서술된 위덕왕 원년(554년)과 11년(564년) 기사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그 실체는 660년에 백제가 나당연합에 무너져 신라에 병합된 후 문무왕 12년(672년)에 완산주서(完山州誓)가, 신문왕 5년(685년)에 완산주(完山州)가 설치되면서부터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완산주는 경덕왕 16년(757년)에 전주(全州)로 개칭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록들이다. 다만, 삼국유사와 달리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보장왕 9년(650년)에 ‘완산 고대산(孤大山)’으로 이암(移庵)했다고 기록된 바, 650년 이전부터 완산으로 불려왔을 가능성에 기대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완산이라는 명칭은 어디에서 유래하였을까? 『완산지』에 따르면, 전주부 남쪽에 있는 고덕산에서 뻗어 나와 전주부의 안산을 이루는 산이 완산(完山)이라 하였다. 전주부에서 남쪽으로 3리에 위치한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완산칠봉(完山七峯) 자리다. 당시 전주부의 진산(鎭山)을 전주부 북쪽 10리에 있는 건지산(乾止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건지산-전주부-완산의 배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을 것으로 사료된다.

한편 고지도에서 완산의 위치 표기는 주목할 만하다. 18세기에 제작된 해동지도의 전주부도, 19세기에 제작된 전주부지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0호)와 완산부지도(보물 제1876호)는 모두 완산을 지금의 장군봉 위치에 두었다. 또한 전주부지도와 완산부지도를 통해 곤지산과 주봉(투구봉)의 위치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완산의 가장 높은 꼭대기가 옥녀봉으로 표기되어 있어 지금의 인식과 차이가 있다. 그리고 1899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완산도형을 통해 곤지산과 주봉뿐만 아니라 주봉의 서남쪽 매화봉에서 곤지중학교로 뻗어 내린 능선이 쇠도봉(釗刀峯)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근거로 볼 때 인터넷 위성지도에 표기된 완산 일대의 지명과 위치는 하루 빨리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완산의 유래와 위치로 볼 때 전주와 완주를 아우르는 고을명[州名]으로서 대표성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고려 때 이규보는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전주는 완산이라고도 일컫는데, 옛날 백제국이다....완산이라는 산은 나지막한 한 봉우리에 불과할 뿐인데, 한 고을의 이름이 이런 산으로부터 불리게 된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고 적었을 정도다.

완산의 주변에서는 몇몇 유적이 조사된 바 있다. 완산서초등학교(당시 효정국민학교) 부지에서 조사된 효자동 유적은 후기 마한의 무덤과 집자리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또 효자주공 3단지 동편에 있는 안행공원에서는 시대 미상의 고분군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바로 인근의 무학봉 아래 외칠봉 2길 일대에서 삼국시대~고려에 해당하는 유물산포지가 확인되었다. 또한 완산의 남쪽인 평화주공 2단지의 동쪽편 야산에서 5~7세기대 백제 고분군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고고학 자료에 비추어 볼 때 완산의 뿌리는 후기 마한 시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비록 백제의 기록에 남겨지기는 했을지라도 백제 때 마을이 생겨났다고 보기에는 너무 갑작스럽고, 백제인들보다는 마한 토착민들의 마을과 연관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역사기록도 없고, 축적된 고고학적 성과도 별로 없는 현실에서 완산의 기원을 상세하게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유력자의 마을과 완산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었던 어떤 계기가 존재했을 개연성을 상정해볼 수 있겠다. 당시 유력자를 중심으로 완산에서 또는 완산을 배경으로 어떤 사건이나 이벤트가 발단이 되어 작은 봉우리가 만인에게 회자되지는 않았을까? 또는 완산이 자리하는 곳에 유력자의 마을이 위치해 있었을 것이므로 유력자를 비롯한 추종자들이 회맹(會盟)의 장소로 완산에 모임으로써 대표성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계기를 통해 완산은 이 일대에서 중심지로 통하게 되었고, 상징성과 대표성을 얻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추정해본다. 결국 작은 봉우리가 가지는 공간성은 전주 일대를 아우르는 집체적인 성격으로 확대되어 하나의 고을로 발전하게 되었을 가능성에 이르게 된다. 완산칠봉 일대에 대한 정밀조사가 이루어져 완산의 탄생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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