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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무사는 왜 운봉에 묻혔을까

옛 이야기에서 전북을 만나다:가야유적
2010년, 남원 월산리 고분군에서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가야계의 철제 무기와 갑옷, 투구 그리고 토기들이 쏟아져 나와

기사 작성:  이종근
- 2020년 11월 30일 08시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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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운봉고원의 철광석이 서로 만나 탄생된 것이 운봉고원 내 제철유적이다.

조선시대 ‘십승지지’이자 ‘신선의 땅’으로 널리 알려진 운봉고원은 한마디로 철광석의 산지이다. 운봉고원 철광석은 니켈의 함유량이 높아 철광석 중 최상급으로 평가받는다. 이제까지의 지표조사를 통해 40여 개소의 제철유적이 운봉고원에 집중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다.6) 백두대간 노고단에서 지리산 달궁계곡을 지나 삼봉산까지 그 분포 범위가 30km에 달한다.

기원전 84년 마한의 왕이 전쟁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마한의 왕이 피난지로 삼은 곳은 지리산국립공원 내 뱀사골계곡 서쪽 달궁계곡이다. 백두대간 노고단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줄곧 동쪽으로 흐르면서 달궁계곡을 이룬다. 2100년 전 지리산 달궁계곡으로 피난 온 마한 왕이 남긴 지명이 달궁과 왕궁이다. 우리나라의 지명에서 궁자는 대부분 활 ‘弓’자를 쓰는데, 마한 왕의 전설이 살아 숨 쉬는 지리산달궁계곡의 ‘궁’자는 집 ‘宮’자를 쓴다.

백두대간의 정령치·성삼재, 팔랑치 등도 마한의 왕과 관련된 지명들이다. 지리산 달궁계곡 서쪽 관문 성삼재는 성이 다른 세 사람의 장수들이 지킨 고개라는 뜻이다. 그리고 팔랑치는 운봉읍 일원에서 달궁계곡 달궁터로 향하던 고개를 8명의 젊은 남자들이 지켜서 유래됐다고 한다. 남원읍지 『용성지』 및 『여지도서』에 달궁터, 정령치 등과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는데,9) 그 내용을 옮겨보면 아래 와 같다.

‘황령과 정령은 둘 다 지리산 기슭 입세에 있으며, 몹시 가파르고 험하여 소나 말이 다닐 수 없는 곳인데, 거기서 서쪽으로 남원부까지는 50리 쯤 된다. 옛 승려 청허당의 황령기에는 “옛날 한 소제 즉위 3년에 마한의 임금이 진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도성을 쌓았는데, 그 때 황·정 두 장수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고 고개를 지키게 했으므로 두 장수의 성으로 고개 이름을 삼았다. 그 도성을 유지한 것이 71년이었다.”고 했다. 지금도 무너진 성돌과 허물 어진 성벽이 남아 있으며, 그 도성이었다는 곳을 세상에서는 달궁터라고 전한다. 두 고개 안에 있는 골짜기가 본래는 남원 땅이었으나 지금은 운봉에 속한다’

1982년 첫 발굴조사에서 백제의 고분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돌덧널무덤에서 가야계의 철제 무기와 갑옷 및 투구 그리고 토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변의 두락리 고분군, 건지리 고분군 등 운봉고원 일대의 고분들을 모두 합하면 그 수가 거의 100여 기에 달해 영남지역의 주요 가야 고분군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금은새김고리자루칼, 쇠도끼와 쇠창, 화살촉 그리고 투구와 비늘갑옷, 재갈과 등자 등의 말갖춤을 만날 수 있다. 이를 통해 운봉고원 일대에 100여 기에 가까운 고총고분이 축조될 수 있었던 배경과 월산리 고분군 주인공의 군사적인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특별히 만들었던 돌무덤과 그릇들을 통해 운봉고원을 거쳐 백두대간을 넘었던 가야문화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닭의 머리 모양이 달린 천계호는 지금까지 백제지역에서만 출토되어 왔으며, 자루솥은 음식을 조리하거나 술을 데울 때 쓰였던 도구다. 주로 왕과 상류층의 무덤에서 발견되고 있는 자루솥을 통해 운봉고원에 묻힌 가야 무사의 높았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다.

2010년 10월, 남원 월산리 고분군에 대한 발굴 조사가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가야계 투구와 비늘갑옷은 물론이고 경주 황남대총이나 서울 풍납토성 등 왕이나 상류층과 관련된 유적에 껴묻혔던 자루솥, 백제지역에서만 출토되고 있는 중국제 자기 천계호(天鷄壺)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운봉고원에서는 대체로 마한과 백제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가야계의 철제 무기와 갑옷, 투구 그리고 토기들이 쏟아져 나왔었다. 금은새김고리자루칼은 거북무늬등과 꽃무늬, 파도무늬를 금과 은으로 상감해 삼국시대 상감공예품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멋을 뽐내고 있다. 철제 투구의 경우, 경상도 지역의 고분군에서 출토되고 있는 투구들과 유사하지만, 이마 부분에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챙이 결합돼 있는 점이 이채롭다.

중국 삼국시대 말에 처음 만들어져 남북조시대까지 크게 유행했던 천계호는 차를 담는 용기이자 상류층의 무덤에 들어가는 명기였다. 닭의 머리 모양이 달린 천계호는 지금까지 백제지역에서만 출토돼 왔는데, 월산리 고분군 출토품인 중국제 천계호는 가야지역에서 최초의 발견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른 바 ‘구름 속의 땅’ 운봉은 한반도의 물줄기를 동서로 가르는 백두대간 동쪽의 고원지대다.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기 위한 얼마 되지 않은 길목 중의 하나. 오래 전부터 군사·교통의 요충지였음은 물론, 수많은 드라마가 탄생했던 땅이었음은 분명하다.

1500년 전 가야 무사가 남긴 최상의 보물로 미뤄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와 가야의 역학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유지했던 또 다른 가야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다. 운봉고원은 가야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와 가야 및 신라가 교통한 중요한 길목으로 여러 나라의 갈등과 화합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가 만들어졌다. 운봉고원은 대체로 마한과 백제의 영역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월산리 고분군이 발굴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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