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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기회의 공정이 아닌 조건의 공정이 정의이다
2017년 05월 18일 (목) 강주영 기술자 APSUN@sjbnews.com
   
 
   
 

취임하자마자 세월호 유족을 만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새 대통령이 만났다. 약자를 만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이 감동을 부르는 것은 지난 시절에 약자들이 그만큼 억눌려서이다. 경쟁에서 배제되어 서열의 끝에 있는 이들은 새 정부에 기대를 가지게도 된다.

교육에서는 등수와 서열을 매긴다. 대학의 서열은 학벌사회를 만들었다. 노동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위계가 있다. 각각의 노동 내부에서도 성과평가제와 같은 경쟁의 서열이 있다. 산업계는 양극화되어 있다. 선거법도 승자독식이 있을 뿐이다. 하긴 지난 시대에는 그 경쟁의 질서마저도 유린되었다. 배제된 자들은 부모를 탓하거나 이른바 ‘빽’이 없음을 한탄해야만 했다.

다윈주의자들은 치열한 경쟁과 적자생존을 진화의 주요한 요인으로 생각하였다. 경쟁과 적자생존은 오늘날 상식이 되었다.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는 이타성조차도 보상을 바라는 이기적 심리에서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달리 러시아의 크로포트킨은 자연계와 인간 사회 모두에서 다윈주의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였다. 그는 자연계와 인간사회의 수 많은 사례를 들어 ‘경쟁과 적자생존’보다는 ‘상호부조의 원리’가 진화의 더욱 주요한 요인이라 주장했다. 대평원을 이동하는 들소떼들, 꽃가루를 날라 꽃을 피우는 꿀벌, 군집 생활과 협업적 노동의 개미떼들, 분업적 협력의 인간 사회, 촌락의 공동체, 두레노동 등 야생의 자연과 인간사회는 생존하고 진화하기 위해 서로 상호부조하는 공동체를 이루었다. 경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배제적 경쟁이 문제이다. 협력적 경쟁은 없는 것인가?

많은 이들이 공정함을 강조하지만 많은 경우 공정함은 경쟁의 질서에 머문다. 기회가 공정하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원천적 조건이 아예 없거나 부족할 경우 기회의 공정함은 탈 수 없는 기차이다.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의 자녀들은 유명 대학을 갈 수가 없다. 부모의 헌신 없이 학교 체육에만 맡겨서는 프로선수가 될 수 없다. 소농은 자본농을 이기지 못한다. 구멍가게는 편의점에 밀려서 사라진다.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도 대기업에게 갑질을 당해야만 한다. 재벌을 규제한다고 하지만 재벌 규제는 산업계의 상층과 주주들간의 질서 조정이지 산업계의 저 밑바닥에 있는 노동과 영세 자영업자에게도 그 혜택이 오리라고 보지 않는다.

지금 시기에 경쟁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만으로도 개혁이라고 할 수는 있다. 일거에 할 수 있다면 혁명이지 개혁이겠는가? 개혁의 속도와 순서에는 동의할 수 있다. 허나 출발이 원천적 조건의 공정함을 이룰 수 있는 출발이어야 한다. 우수자원만을 모아놓은 일류대학이 지식의 표준이던 시대는 지났다. 서열화된 국공립대학은 통폐합하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 무엇을 공부했는지가 중요하지 무슨 대학인지는 묻지 않는 사회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졸업장에 대학이름이 명기되어서는 안된다. 농촌에 아무리 자금을 쏟아부어도 나아지지 않는다. 소농 연대 농업협업화만이 대기업 식품회사에 하도급화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노동복지를 위해서는 면세 받는 사내근로복지기금을 전제 노동자들이 같이 사용하는 ‘노동연합기금과 공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 점에서는 대기업 노동자들의 양보가 필요하다. 노동연합기금이 만들어지면 대기업 생명보험이나 손해보험에 가입할 필요가 없다. 노동자들은 동일노동동일임금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라도 ‘노동연합기금’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영세자영업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의 시장 진입 금지 품목을 확대하고 시장점유율도 낮추어야 한다. 현재처럼 대기업이 생산의 40%, 영업이익의 60%를 독점하면서 고용은 4%에 불과한 경제체제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최저임금 1만원’, ‘동일노동 동일임금’, ‘비정규직 해소’는 불가능한 일이다. 노동자들은 위 목표를 이루는 과정의 수단에 대해서 주장해야지 목표만을 주장해서는 사회적 공감을 이루기가 어렵다. 노동 내부에서부터 상호부조를 만들어야 한다.

정치에서도 상호부조의 원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선거법 개정 뿐 아니라 자치사법과 자치단체모형 자주권 같은 민주주의 본래의 조치가 필요하다. 국가는 자치권력의 연합의 연합이지 지배자가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극복이 권력 상층부의 질서 재조정에 그쳐서는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초원의 배부른 사자는 절대 사냥하지 않는다. 마을이 노약자를 돌보던 시대가 있었다. 관혼상제가 마을의 공동사였던 시대에는 마을에 굶주린 자가 없었다. 관혼상제가 영리기업의 일이 되고 치안도 경찰의 일이 아닌 사설 보안업체의 일이 된 시대이다. 이제 마을이 작은 공화국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상호부조의 원리를 마을 전체에 확산시키는 마을의 새로운 탄생을 위해 노력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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