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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有, 노동의 새벽을 짓누르다
그림 인문학을 엿보다
2017년 04월 06일 (목) 박제원(전주 완산고 사회교사) APSUN@sjbnews.com
   
 
  ▲ 쿠르베 작 `돌깨는 사람들' 1849, 캔버스에 유채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생산방식은 공장제 수공업을 거쳐 대규모 생산이 가능한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바뀌었다. 농촌지역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은 더 많은 소득을 기대하고 공장 주변이나 공장이 밀집된 도시로 몰려들어 공장노동자가 되었지만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조건에 시달렸으며 도시 주변부 지역에 하층 빈민가를 형성했지만 삶은 가혹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는 생존해야 했던 가난한 노동자나 농민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선아: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1855년 쿠르베가 당시 주목받지 못하던 그의 작품들을 모아 개인전을 열게 되었는데 그 명칭을 ‘리얼리즘(’Realisme)’이라고 붙이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더군요. 미술사조로서 사실주의는 무엇인가요?

채하: 19세기 중반 쿠르베, 밀레, 도미에 등의 화가들이 당대의 현실을 그대로 그리려고 했던 사조이다.

선아: 주류 미술계는 사실주의적 화풍에 대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비난했다고 하더군요.

채하: 맞다. 쿠르베 이전에는 “그림은 아름다운 것만을 표현하며 그 경우에만 예술이다.”고 여겼거든. 쿠르베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부정하며 사회주의적이라고 비난받았단다.

선아: 아하, 그랬군요. 하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에요. 우리 역사에서도 자주 있었던 일이잖아요. 反民主的인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정치적 독재와 인권탄압을 감추기 위해 정치적 비판세력에 대해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던 ‘붉은색 덧칠하기’를 잘 알고 있거든요.

채하: 쿠르베는 굽히지 않았단다. “나는 프랑스 혁명의 지지자이고 공화주의자이지만 무엇보다 사실주의자이다.”고 자신을 변호했거든.

선아: 공화주의와 사회주의는 모순적인가요?

채하: 꼭 그렇지 않단다. 공화주의나 사회주의는 모두 사회적 평등과 공공선을 실현하려고 하지만 공화주의는 의지적 측면이 강하고 사회주의는 제도적 측면이 강하다고 볼 수 있지.

선아: 쿠르베가 그림에서 드러내려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채하: 노동의 가치라고 할 수 있지.

선아: 노동이 소중하다고요? 저도 그렇고 노동은 우리들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것 아닌가요?



채하: 쿠르베의 대표적 작품인 <돌 깨는 사람들>로 노동의 가치를 설명해보도록 하자. 이 작품의 원본은 지금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게도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폭격으로 소실되었지. 그림에서 모자를 쓴 인부가 한낮의 뙤약볕 아래에서 무릎을 꿇은 채 도끼로 열심히 돌을 깨고 있다. 조끼는 찢어져 있으며 바지도 무릎이 기워져 있을 정도로 남루하단다. 외형적 느낌도 늙어 보인다. 그 옆의 젊은이를 보더라도 찢어진 윗도리를 걸치고 무거운 돌을 힘겹게 무릎으로 받치고 있다.

선아: 단지 채석장에서 일하는 풍경을 담고 있지 특별한 의미는 없잖아요?

채하: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그와 가깝게 지냈던 프랑스 사회주의자 피에르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의 사회개혁 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각자의 재산 중에서 남의 것을 훔친 것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단다.

선아: 그러면 저의 재산 중에서 도둑질한 장물이 있다는 것이에요? 저는 어떤 것도 훔치지 않았습니다.

채하: 꼭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프루동의 노동관을 알게 되면 너의 소유물 중에서 장물이 있을 수도 있어.

선아: 프루동이 개인적 소유를 도둑질이라고 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채하: 프루동은 노동함으로써 얻는 소유만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노동가치설’이라고 할 수 있단다. 물론 고전파 경제학의 시조였던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최초로 주장한 이론이지만 그의 이론과는 차이점이 있다. 아담 스미스는 노동자의 노동과 기계의 노동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다고 보았고 결과적으로 자본의 몫으로서 이자, 이윤, 지대를 정당화했지만 프루동은 아담 스미스의 관점을 부정했단다.

기계, 토지와 같은 생산수단은 노동을 하지 못한다고 보았거든. 그것은 노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거나 자연적인 것으로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며, 그저 생산하는데 소모된 만큼 자기의 가치를 생산비용으로 이전하며 오직 노동자의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하며 자본(기계, 토지, 금융자산)의 몫은 없고 자본으로부터 나오는 이윤, 토지로부터 나오는 지대, 빌린 돈으로부터 나오는 이자 등은 모두 착취라고 보았단다. 즉 도둑질이라는 것이지.

선아: 아~ 그래서 프루동은 개인적 재산은 남는 것을 모아놓은 것인데 노동자의 임금은 매우 낮아 잉여가 없고 결국 축적된 사유(私有)는 도둑질이라고 여겼군요. 당연하게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가 그 대가로 이자, 지대, 이윤을 가져가면 모두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를 훔치는 것에 불과하고요.

채하: 맞다. 프루동에게 소유는 두 가지였다. 그가 노동해서 얻는 소유와 자본으로부터 얻는 소유가 있는데 자본적 소유는 옳지 않다고 보았다. 너도 말했다시피 타인의 노동을 착취한 것이니까. 하지만 농민의 경우에는 예외적이었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어도 소규모적이기 때문에 인정했다. 그가 도둑질이라고 한 소유는 대규모 공장이나 대토지 소유자가 얻는 자본소득이었다.

선아: 결국 그는 노동만이 가치를 만들고 그 가치를 만든 노동자에게 그 대가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군요. 그 점에서 정도전의 토지개혁의 사상적 기초였고 아시아적 생산양식에서 민본(民本)의 물적 토대였던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군요.

채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선아: 하지만 노동을 통한 소유만이 정당하니까 노동이 가치 있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것 같아요.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를 구별하게 해주는 일반성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채하: 예리한 지적이구나. 노동자와 자본가를 구분하기 이전에 노동은 자연을 인간에게 유용한 형태로 바꾸는 과정인데 그 가치를 설명하려면 당연히 일반성이 있어야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사회를 만들거나, 문화를 창조하거나, 이성적으로 행동하거나 이런 것들이 다 인간다움이라고 할 수 있지만 노동도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경계란다. 짐승이나 식물은 주어진 자연 그대로를 이용하여 살아가지만, 인간은 노동을 통해 인간의 생존 능력을 키워가기 때문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을 육체적으로 고달픈 일로만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라고 할 수 있어.

선아: 선생님의 설명을 듣다보니 지난 1984년 박노해 시인이 발표한 <노동의 새벽>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옵니다. 그도 쿠르베처럼 고통으로 추락한 노동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켜 대한민국을 ‘인간적 사회’로 이루고 싶었던 것이군요. 쿠르베 강의에 대한 보답으로 그의 시를 낭송해 드리겠습니다.

노동의 새벽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박제원(전주 완산고 사회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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